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제4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 1부에서는 정주진 박사가 소개한 「평화를 보는 눈」(개마고원, 2015)의 요지를 소개했다. 이번 호에는 정주진 박사의 발제를 중심으로 용서와 화해, 정의와 비폭력, 평화적 감성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토론문을 게재한다.
토론자 :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허석(원불교 종로교당 교무, 원불교학)
어디까지가 비폭력일까
이찬수: 책의 의미와 요지를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하다.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고 실속있는 토론이 되도록 하기 위해 범주를 좀 좁혀 관계와 공동체, 용서와 화해, 비폭력 저항 문제를 집중 토론했으면 한다. 먼저 한국 사회 운동에서 어느 정도를 비폭력적 저항으로 보아야 할지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짚어주면 좋겠다.
정주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때 경찰과 시민의 충돌이 잦아지자 YMCA가 소규모 사람들을 모집해 길에 누워 비폭력 저항을 했다. 그런데 경찰들이 그대로 짓밟고 갔다. 이런 상황을 보고 비폭력 저항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아무런 영향이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저항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도 비폭력 저항 덕분에 확산될 수 있었다. 경찰이 강경 진압을 하는 데도 비폭력으로 대응하다가 다수가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고 경찰이나 지방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결국 흑인들의 행진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사례들이 세계적으로 많다.
이찬수: 비폭력 저항으로 폭력적 정권이 바뀌거나 폭력적 구조가 바뀌게 되는 사례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정주진: 미국의 민권운동이 그 사례다. 구조가 바뀌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만 보더라도 즉각적으로 효과가 생기지는 않았다. 소금행진으로 간디는 감옥에 갇히고 많은 이들이 지속적으로 비폭력 저항을 했다. 수 백 명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체포당한 일이 전 세계에 뉴스로 타진되면서 영국 정부의 비인도적인 모습이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 일들이 축척돼 인도의 독립에 기여했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부당하다는 것을 세계에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3·1 운동이라는 비폭력 저항의 성격을 가진 만세 운동이 계기가 돼 그 뒤에 저항 운동이 확대되고 지속되지 않았는가.
비폭력에도 합의가 필요하다
이찬수: 현재 하나의 시위문화처럼 자리 잡은 촛불시위는 전체적으로 비폭력적이다. 하지만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나 정치권력과 직접 부딪치면서 일부가 폭력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이런 정도의 촛불시위를 비폭력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또 촛불시위가 축제 같다가도 일부 지도적 세력이 개입해 다소 선동적 발언들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 많은 시민들은 급격히 선동되지는 않지만, 어떻든 기존의 비폭력적 분위기가 깨지게 되는 경우를 본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비폭력적 저항이 되도록 하는 데도 무언가 원칙과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주진: 집회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곤 한다. 전에 들은 얘기인데, 본래 목적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예배가 끝나고 일부 사람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주장 내지 선동하면서 곤란한 상황이 펼쳐졌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현장에 간 사람들에게는 난감한 상황일 수 있다. 그들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고, 함께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민도 하게 된다. 이것은 결정방식이 폭력적인 경우다. 물리적 힘이 동원되지 않고 말뿐인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큰 압력과 강요가 된다. 다른 말로 폭력적인 상황이 된다. 물론 그렇게 되면 경찰과의 폭력적 충돌도 생기게 된다. 그 상황이 제대로 다뤄지려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토론을 하고 합의를 통해 결정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다수에 의해 폭력이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전병술: 공공 갈등 때문에 벌여지는 시위, 정책 갈등 때문에 벌여지는 시위에 폭력이나 비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가? 비폭력적 저항은 생존의 문제가 걸린 경우 아닌가. 간디의 비폭력적 저항도 국가 생존의 문제에서 적용되는 것 같다.
정주진: 어떻든 전략적으로 폭력적 수단에 의한 저항을 선택하느냐, 아예 배제하느냐의 문제다. 나는 어떤 경우든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제보다는 폭력 쪽으로 시선이 가게 되기 때문이다.
비폭력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전병술: 옆에 내 친구가 깔아 뭉개지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도 정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어렵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주진: 비폭력에는 전략적 비폭력과 원칙적 비폭력이 있다. 전략적 비폭력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비폭력을 선택하는 경우다. 예전에 사회운동을 할 때도 여론이 안 좋아지면 폭력적 방법을 자제하는 경우가 있다. 수위를 조절한다. 하지만 진짜 비폭력은 원칙적 비폭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폭력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폭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무장갈등의 상황에서 비폭력의 원칙을 주장하는 것은 때로 위험한 일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사자들이 선택할 문제지 외부인이나 제3자가 무조건 원칙적 비폭력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무기를 선택한다면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학에서는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비폭력 저항은 절대적으로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허 석: 폭력의 범위는 넓다. 구조적, 문화적, 언어적, 물리적, 내면의 폭력 등 다양한데, 이 때 비폭력이 일방적으로 맞거나 참는 것만이 비폭력은 아니지 않은가.
정주진: 비폭력은 단순히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사실은 비폭력 저항을 의미한다. 비폭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모두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변화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일들이 함께 가야 한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 혼자 도망치거나, 그 자리를 피하거나, 내 몸을 단순히 폭력에 내주는 일은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지 비폭력 저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 석: 만일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것이 더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그것도 용인 되는 것이 비폭력인가. 예를 들어 누군가를 혼내고 야단치고 하는 것들이 외형적으로는 폭력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고 평화를 이루고 화해로 이어졌다면 그 행위를 비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전병술: 가령 광주항쟁 때 군에서 발포했는데도 시민군이 총을 안 쐈다면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시민군이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비폭력 저항이 옳다고 말하라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주진: 결과가 좋다고 폭력이 아닐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의 가해자들이 내세우는 핑계이기도 하다. 가정과 사회에서 폭력을 가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를 위한 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폭력이 평화와 화해로 이어질 수는 없다.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고 그것은 폭력의 피해자나 상대적 약자로 아직 자기 목소리를 내고 저항할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은 발생한 상황과 시점에서 판단되는 것이지 절대 결과로 판단되지 않는다. 무력 저항의 경우에는 결국은 당사자들의 선택이 존중 될 수밖에 없다. 남미의 해방신학도 남미의 상황에서는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선택이다. 비폭력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을 무조건 인정할 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비폭력 저항이 전략적으로 더 바람직하고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이지만 모든 무력의 사용을 다 비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적 재난이 일어났을 때 국제 사회에서 무력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대량학살과 같은 참혹한 재난에 대해 외부에서 무력개입을 했을 때 그 개입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노력을 한 후 최후의 선택인가,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비폭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성의 회복...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 혼자 도망치거나, 그 자리를 피하거나, 내 몸을 단순히 폭력에 내주는 일은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지 비폭력 저항이 아니다
용서가 노예도덕이 되지 않으려면
전병술: 사형제도와 관련해서 사형수 인터뷰를 해보면, 사형수에게 아들이나 딸을 잃었지만 가해자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감옥까지 찾아가서 사형수를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의 없는 용서와 화해는 있을 수 없다는데, 그러면 정의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찬수: 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용서는 니체가 말한 노예도덕 수준에 머물게 될 가능성도 있다. 가령 정의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및 사회가 공정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도리라고 한다면, 그 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공통의 공감대를 도출해 내기는 쉽지 않다. 정의를 이야기하다 보면 사회적 합의를 이야기하게 되고, 사회적 합의는 결국 법을 통해 나타나고, 법은 좋든 싫든 누구든지 따라야 하는 강제적인 것이다. 법으로 정해지는 순간에 그 법으로 인해서 무언가를 누리는 사람도 있고, 법으로 인해 억압을 받게 되는 사람도 있다. 법 자체가 절대적 공평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 마당에 법을 기준으로 정의를 이야기하고, 그 법적 정의를 전제로 용서와 화해를 요청하다가 자칫 법에 종속되고, 희생자를 다시 희생시키게 되는 가능성도 크다.
정주진: 그렇다. 종교에서도 정의를 가르치지 않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하게 용서와 화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희생자를 재희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희생자 중심의 정의여야 한다
전병술: 비폭력적 저항 하면 대부분 간디와 같은 상황을 떠올리는데, 간디와 같은 상황과는 다른 부분들이 많지 않은가.
정주진: 정의와 관련한 담론은 많다. 사법적 정의, 사회적 정의, 그리고 평화학에서 이야기 하는 정의도 있는데, 평화학에서 이야기 하는 정의는 희생자의 정의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정의가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고 잘못한 것을 어떻게 책임지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 기준은 희생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타당한 것이냐, 희생자가 인정하는 수준에서 정의가 이루어졌느냐를 봐야 한다. 이것은 사법적 정의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차선을 선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아공에서는 진실과화해위원회를 통해 기존의 사법적 처리가 아니라 가해자가 범죄를 고백하고 그것이 개인의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 때문인 것이 입증되면 용서를 해주었다. 또한 대안적인 접근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서 대화를 한 다음 피해자가 가해자가 치르기 원하는 대가를 얘기하고 그것을 가해자가 받아들이는 방식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도 한다. 이런 대안적인 방식은 희생을 당한 피해자의 정의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피해자-가해자 관계를 회복시키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법적 정의에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어갈 여지가 좁다. 사법적 정의는 국가의 법에 대한 위반을 중시할 뿐 피해자의 필요와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찬수: 희생자 입장에서의 정의와 사법적 정의가 충돌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정주진: 희생자의 정의가 우선이다. 대안적 방식을 사법체계 안에 넣어 실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초범이나 청소년 범죄 같은 경우 재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피해자와 만나서 결정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가해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그리고 피해자 입장에서는 내가 어떤 피해를 받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서 서로 간에 합의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봉사를 요구할 수도 있고, 물질적 피해 같은 경우에는 일정 기간 동안 보상하라고 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왜 나인가?’의 문제라고 한다. ‘왜 나한테 그런 일을 저질렀냐?’하는 질문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답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법제도 안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합의 될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평화활동가 중에는 종교인이 많은가
이찬수: 정박사님이 보기에 평화활동가나 운동가들이 이런 비폭력적 저항에 대해서 연구나 고민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
정주진: 최근에는 많이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적용도 많이 하고 있다. 평화단체나 평화 활동가들은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찬수: 비폭력적 저항을 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배경을 알 수 있을까? 비폭력적 저항은 종교적 내공이나 영성이 뒷받침될 때 감정에 덜 휘둘리고 그만큼 원칙도 지켜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주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평화 단체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평화 이슈를 다루는 단체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문제와 관련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하는 단체이다. 두 번째 경우가 비폭력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가깝다. 하지만 비폭력에 얼마나 철저한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어떻든 이들은 폭력적인 대응보다는 비폭력적인 대응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나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저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높다.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내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에 폭력적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활동가들의 의식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찬수: 평화운동가들이 비폭력적 저항을 하면서 상대방에게도 인권이 있고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인정한다는데, 비폭력적 효과를 경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비폭력에 종교적 이념이 뒷받침되면서 일단은 폭력은 거부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건지 궁금하다.
희생자의 입장에서 정의가 이루어졌는가...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고 잘못한 것을 어떻게 책임지게 할 것인가의 문제. 그 기준은 희생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타당한 것이냐, 희생자가 인정하는 수준에서 정의가 이루어졌느냐를 봐야...
정주진: 개인적 짐작이지만 다 섞여 있다고 본다. 비폭력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보면서, 누구의 인권이든 존중되어야 하고, 전략적으로 봤을 때도 비폭력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하수이고,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고수라는 인식도 있다. 평화교육의 영향도 있다. 평화교육은 폭력적 상황에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 대응을 선택할 수도 있음을 교육한다.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교육을 받아서건 깨달음을 얻어서건 평화를 자신의 가치로 삼고 태도를 바꾸는 사람은 언어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폭력에 직면했을 때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선택을, 즉 평화적 선택을 하게 된다.
평화학에서 종교란
이찬수: 종교와 평화의 접점 혹은 관계의 문제를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시대의 종교라는 것은 뭔지 고민을 해야 한다. 교회에 출석하고 출가하고 이른바 성직자라는 전문종교인의 길을 걸어야만 종교적인 것인가 싶다. 특히 미래 시대로 갈수록 종교법이든 사회법이든 법률과 제도에 충실한 사람보다는, 특정 종단에 출석하지는 않더라도 비폭력적 저항을 하고 평화를 교육하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회를 건강하게 돌아가게 하는 데, 대중을 많이 모으는 교화 방식보다는, 폭력으로 인한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 교육을 실천하고 비폭력 저항으로 폭력을 줄이는 일이 정말 종교적 내공을 필요로 하는 길일 것이다.
전철후: 폭력으로 희생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함께 공감해 주고 올바른 종교적 신념으로 평화영성을 사회 속에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저도 종교인 또는 종교가 가져야 할 참된 본질적인 교화가 무엇인지 고민을 한다. 종교라는 조직보다도 종교인이 세상과 호흡하면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평화교육의 목적이 여러 선택의 폭을 넓혀 준다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폭력 저항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지시켜주고 평화 영성에 민감해지도록 교육시켜주고 하는 문제들을 고민하는 일이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이다.
허 석: 화해와 용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계와 수많은 가해자 및 피해자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서 그저 이상을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화해와 용서에 도달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종교인들은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이상적인 인격을 동경하고 있다. 그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 인격적 도야를 하고, 은혜와 평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치열한 삶의 단계와 현장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여실히 봐야겠다. 이런 것을 보지 못하고 영성이니 평화니 하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평화학자가 평화적 감성을 체득하는 방법
이찬수: 폭력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문제고, 용서와 화해는 물론 정의도 당사자들이 받아들여지는 문제거나 피해자들의 문제기도 하다. 법적 정의의 문제를 떠나 당사자들의 내면에서 무언가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영역과도 만나는 지점이다. 인간의 내면 대 내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세계, 말하자면 평화적 영성의 문제도 중요하다. 영성이라는 것이 종교에서 주로 쓰는 말이지만, 평화적 감수성이라고 표현하든 평화학 분야에서도 중요하다. 실질적으로 평화교육이나 공동체에서 공유하는 것도 최종적으로는 평화적 감수성 혹은 영성의 문제 아닌가. 평화적 감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훈련이나 움직임들은 어느 정도인가.
정주진: 저 같은 경우에는 평화 민감성, 폭력 민감성 이렇게 표현을 한다. 훈련을 해야 한다. 배우고 나서 실천하는 훈련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것은 평화의 구체적 실현 방법을 고민하는 평화연구자나 평화실천자나 누구나 해야 할 과정이다. 평화학을 하는 사람들은 평화적 감성이 몸에 배어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평화로운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훈련이 되어 있는 편이다. 알고 있고 또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생각한다. 제 경험에 비추면 평화학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 과정에서 개인적 변화를 체험한다. 이론이 아닌 환경과 관계의 경험에서 비롯된 변화가 40% 이상 된다고 본다. 적어도 평화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고 논쟁이 생기면 그것을 푸는 방식이 다르다. 위기에 직면 했을 때도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평화학을 공부하는 환경 속에서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 같다.
이찬수: 나의 경험으로 보면, 대학에 신학과도 있고, 종교 관련 학과도 있지만, 좀 깊이 들여다보면 그 학과 학생들이라고 해서 일반 학생들보다 월등히 종교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종교 연구자들 모임도 그 구조는 일반 사회와 과히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학교들도 끝없이 구조조정 한다고 난리 아닌가. 그런데 평화학 하는 사람들은 공부 과정에서 평화적 감성 혹은 평화적 민감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경향이 있다니 다소 놀랍다. 체득의 정도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궁금해진다. 어떻든 정말 그렇다면 평화학자가 신학자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주진: 평화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종교 공동체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만큼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위계질서도 강한 편이고 고도로 조직화돼 있다. 종교 조직 내에서 윗자리에 위치하고 특권을 누린다. 하지만 평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바닥(풀뿌리 차원)을 보는 정서가 있고 지속적으로 바닥과 접촉해야 하고 바닥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학자로서나 인간으로서 품성을 인정받아야 제대로 연구와 실천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전철후: 평화학은 사회학적이고 정치적 혹은 경제학적이라는 생각이 컸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평화학 자체가 인간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탐구해야 하고 영성이나, 감성, 심리학적인 부분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평화학은 어떤 형식과 과정으로 공부를 하고 훈련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정주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가령 사회학을 하려면 약자의 문제를 다룰 경우 자기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평화학자들은 특별히 가치를 학문으로 전환시키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자기를 먼저 만들지 않고는 평화학을 꾸준히 할 수 없다. 왜냐면 계속 모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문제를 논의할 때는 텍스트나 이론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나 의사결정 방식까지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와 실천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 평화연구에서는 세세한 것까지 다룬다. 가령 어떤 일로 협상테이블이 마련됐을 때는 간식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국제협상에서도 간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평화교육을 할 때도 그렇다. 항상 간식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간식 주변으로 모이고 간식을 먹으면서 한 두 마디 말을 건네며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론의 실천을 위해서는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연구를 하고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태도가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즉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대면하고 과정을 진행하는 도중에 문제가 드러나고 그것이 결국 과정의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평화학자가 더 종교적일 수 있다
이찬수: 아까도 얘기했지만, 가령 기독교계 신학교를 외적인 눈으로 보면 이타적인 언어로 가득하고 예수의 놀라운 삶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만, 그 속 모습을 자세히 보면 인간성이나 평화적 감성 같은 것 보다는 도리어 제도화된 삶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학도 여느 교학도 일반 사회의 공부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오히려 현실 도피적이거나 현실의 고통을 무책임하게 도외시하면서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주진: 이른바 성직자들은 위계질서의 상위에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교육 제도 하에서 존경받고 대우를 받는 교육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성직자들은 권위 의식이 있다. 일반 신자들도 그런 권위 의식을 당연시하거나 높이 평가한다.
이찬수: 그런 권위 의식을 성스러움으로 치환시키면서 종교 조직도 유지되어 가는 것 아닌가.
정주진: 한국 전통 문화 속에서 더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싶다. 외국의 성직자들은 그렇게 권위적이지 않다.
이찬수: 오늘은 여느 때보다 평화학 자체에 집중해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들이 정리가 되어야 ‘레페스’, 즉 ‘종교평화학’의 개념도 정리가 될 것 같다. 아주 실속 있는 자리였다. 감사드린다.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에큐메니안에 동시 게재하며, 레페스 포럼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