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요한복음서의 한 구절이다. 부활시기에 교회는 꼭 “나는 빵입니다.”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는다. 공관복음서들에 실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먼저 다 듣고 난 다음, 요한복음서의 ‘빵 말씀’을 듣는다.
요한복음서의 이 대목을 부활시기에 듣다 보면, 이 말씀들이 수난과 부활사건 이전의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인 양 느껴진다. 만일 그런 의미로 읽는다면, “나는 빵입니다.”라는 말씀은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깨달음 부활신앙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빵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첫째, 교회가 빵을 나눠주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부활신앙을 심장에 담은 교회는 이제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 혹은 참 생명이요 그리스도이신 그 빵을, 세상에 나눠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셈이다.
사실 미사 때, 사제가 참례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해주는 모습이 이러한 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교회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생명의 빵”을, 혹은 하늘의 은총과 구원을, 비구원의 상태에 있는 이 세상에 “나눠주어야” 하는 임무를 받았으며,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임무라는 의미다.
그런데, 생명의 빵을 “나눠주는” 임무만이 중요해지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초래되기 쉽다. 즉, “빵을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이 강조된다. 아무나 나눠주어서는 안 되며, 누구나 나눠받아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눠주는 권한”이 강조 내지 강화되고, 나눠주는 이는 언제나 나눠받는 이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결국 ‘이 사람이 생명의 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식별하고 판단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언젠가 어떤 본당에서, 영성체 시간에 어떤 여성 신자분이 미사보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주례사제가 성체를 분배해주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데, 이런 모습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빵을 나눠주는 봉사직무가 ‘특권’이 되는 순간이고, 이 때 교회는 갑의 자리에 서게 된다.
게다가 빵을 나눠주는 임무가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면, 교회는 빵을 많이 확보하고 쌓아두며 이를 유지, 관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빵을 ‘잘’ 나눠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기능의 예를 든다면, 오랫동안 교회가 헌신해온 복지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의료사업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수도회와 교구 등은 복지사업을 해왔고 또 하고 있다. 지상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천상의 ‘빵(혹은 은총)’을 더 널리 더 많이 베풀고 나눠주는 교회의 거룩한 실천이었다. 그런데, “빵을 나눠주는 일”이 강조되면서 교회는 때로 창고에 더 많은 빵을, 혹은 재화를 확보하고 쌓아두게 되었고,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사업의 규모를 확장시키게 되었다.
보다 ‘안정적으로 빵을 나눠주기 위해서’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본당이나 교구, 혹은 각종 시설들에 자본이 축적되고, 결국 교회는 일종의 ‘갑’, 혹은 ‘자본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빵 말씀’을 읽는 두 번째 가능성은, “빵이 되는 교회”다. 이것은 1984년 성체대회 때에도 등장했던 슬로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언어가 신자분들만을 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빵을 나눠주는 권한을 가진 이들’ 말고, ‘빵을 나눠받는 이들’에게만, “여러분은 빵이 되라!”고, “그것이야말로 교회의 참 모습!”이라고 외친 것만 같다.
사실 교회가 벌이는 대부분의 사업들, 성당의 신축부터 복지사업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재원은 ‘빵을 나눠받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이들은 이미 “빵이 되어 나누는” 실천을 애초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었다.
신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직자들 스스로가 빵이 되는 것. 그것이 “나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뜻하는 바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내용일 것이다. 이는, 하느님은 더 이상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위에 좌정해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양식이 되셨다는 놀라운 깨달음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서 빵이 되어 나누어지는 “하느님” 앞에서, 교회는 빵이 될 생각은 않은 채, 빵을 나눠주기만 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사명 전부라고 여긴다면 이를 하느님은 어떻게 보실까. 나눠주는 일만 하는 이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빵과 아무 상관이 없다. 빵을 보관하고 관리하고 나눠줄 줄만 알지, 애석하게도 그 자신은 빵과 무관한 것이다.
스스로 빵이 되어야 한다.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 편으로 와서 생명의 빵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말고, 편안히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눠주는 일만 하면 된다며 자만자족하지 말고, 스스로 쪼개어져서 길바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세상의 폭력에 짓눌려 눈물과 피를 흘리는 이들의 양식이 되고, 탐욕스럽게 빵을 찾아 으르렁대는 자본가들과 권세가들에 의해 내쳐진 이들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쪼개져야 한다. 빵이 되기보다 빵의 주인행세를 해왔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은 아무 죄도 책임도 없다고 해왔음에 대해서,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청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갑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빵이 되신 하느님은 “을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을들의 양식”이 되신다. 교회, 특히 제도로서의 교회는 그러한 주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교회 자신도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복음은 비로소 진정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임 루피노 :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수도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