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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5-2 : 난민과 환대
  • 이찬수
  • 등록 2016-09-05 11:10:38
  • 수정 2016-09-05 11: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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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5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는 원불교 강남교당에서 홍정호 박사(선교학)가 “난민과 환대”라는 제목으로 종교의 평화적 실천에 대해 발제하였고, 참석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아래는 토론문의 일부이다. (발제문은 “레페스포럼 5 : 난민과 환대” 참조(바로가기))



토론자:

김상덕(영국 에딘버러대 박사과정, 실천신학)

오현석(중국 북경대 박사과정, 종교학)

원영상(원광대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전병술(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전철후(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원불교학/기록)

조규훈(싱가포르 난양공대 선임연구원, 종교사회학)

홍정호(연세대 강사, 선교학/정리)



실패를 반복하다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만이 참되다.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만이 마침내 실패하는 종교의 평화를 향한 길이다. (발제문)


▲ 4월 16일 레스보스 섬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난민 12명을 로마로 초대했다.



난민을 환대하는 더 옳은 길


- 이찬수: 발제자는 타자에 대한 환대에 있어 국가와 종교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각각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구분하였는데, 이해는 되지만, 이 둘을 이렇게 구분하면, 국가가 환대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오히려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의 보편주의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환대의 실천에 나서지 않는 국가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과 저항을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화에 관한 담론 확장과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저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을 바탕으로 거기에 저항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무조건적 환대를 ‘종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종교’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논의를 위해서라도 환대 자체가 종교인지, 환대를 하는 사람이나 조직 같은 주체를 종교라고 해야 할지 먼저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 김상덕: 흥미로운 발표였다. 발제 초반에 위험을 축적 관리하는 근대 사회의 합리성의 작동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발제자는 근대 사회의 합리성과 오늘날 후기 근대 사회의 합리성이 다른 종류의 합리성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또한 근대 사회의 합리성의 바탕에서 테러가 ‘극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누구의 관점과 입장을 대변하는 말인지도 궁금하다. 테러 국가와 동일시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극악’이라는 말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인천공항에 수개월 동안 체류해 온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해 수고한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종교적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해야 하니까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도운 게 아니었다. 조건적 환대인지 무조건적 환대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이 있으니 도우러 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자칫 종교의 공적 역할을 세속과 구분하는 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 홍정호: 두 분의 논평과 질의에 감사드린다. 김상덕 선생님의 질문에 우선 답변을 드리자면, ‘극악’이라는 건 당연히 유럽과 서방세계의 관점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 보다 더한 악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테러에 ‘극악’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위험 사회의 작동 원리에 균열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 것 때문이라고 본다. 인천공항으로 앞서 달려간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들이 ‘환대’라는 관념에 이끌려서 가지 않았다는 말씀에 동의한다. 환대를 개념적으로 구분한 건 순전히 대화를 위해서다.


또한 평화를 위해 종교가 취해야 할 태도가 ‘비판적 저항’에 있다는 이찬수 교수님 지적에도 동의한다. ‘종교’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대를 실천하고 평화를 향한 ‘비판적 저항’에 참여하는 동안에만 종교는 ‘종교’로서 형성되어 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종교’란 정의내릴 수 있는 명사적 의미에 국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평화를 향한 노력에 참여하는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 환대는 불가능한 일인데, 이 불가능 앞에 자기를 세우는 과정이 곧 ‘종교’가 아닌가?


종교가 왜 ‘되는’ 것을 말해야 하는가? 종교가 왜 ‘이기는’ 길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런 건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굳이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말할 수 있는 영역이 많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넘쳐난다. 종교가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건 그것이 ‘되는’ 혹은 ‘이기는’ 길이라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꿈이라서, 즉 ‘안 되고’, ‘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 김상덕: 그러면 발제자는 종교가 결국 마이너리티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홍정호: 어디에 있든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늘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 김상덕: 종교적 실천, 즉 “환대”가 이상적으로 옳은 것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효과적일 수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박사논문의 한 챕터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다루고 있다. 과거 ‘반전평화주의’는 종교와 도덕적 신념의 문제였다면, 1970년대 이후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저항운동’은 실천적 개념이다. 그것은 저항에 있어서 폭력보다 비폭력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에서 나온 개념이었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발제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화가 이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면서도 종교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사회과학적 시각에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비폭력을 수단으로 활용할 때 평화가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한 논문에서도 비폭력을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한 시민운동이 폭력을 사용한 시민운동에 비해 70%-80% 이상 더 높은 성공을 거둔 사례를 접한 적도 있다(Chenoweth & Stephan, 2008). 그것은 비폭력이라는 저항의 방식이 불의한 억압에 대한 반작용과 함께 대중적 지지와 참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발제자가 말하는 환대가 오히려 테러로부터의 위험을 줄여줄 것이라고 볼 가능성은 없는가? 환대가 오히려 국가에 유익이 된 사례는 없는지, 환대가 테러로부터의 위험을 더 줄여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없는지 궁금하다. 


▲ 난민을 환영하는 프랑스 시민들 (사진출처=twitter @soph_cm)



일부러 지는 길을 선택하다


홍정호: 구체적인 연구들은 살펴보아야 알겠지만, 당장에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제국의 미래」를 쓴 에이미 추아(Amy Chua)와 「관용」의 저자 웬디 브라운(Wend Brown)이다. 둘의 관점이 다른데, 추아는 관용이 제국의 통치에 얼마나 유용한 수단이었는지를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여주면서,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속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관용의 적극적 수용이 절실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과 상응한다. 너를 만나서도 내 입장은 포기 못하겠고, 네 입장을 들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은 이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의 모범이다. 저는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주장도 큰 틀에서 이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관용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는 방식, 니터(Paul F. Knitter)가 말한 “포괄주의를 포용하는 포괄주의자”가 되는 길 이외에 타자와 만나는 길을 서구 기독교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브라운은 다르다. 브라운은 관용을 다문화주의의 통치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한다. 다시 말해 다문화적 관용과 개방성에 대한 넘쳐나는 주장들은 결국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지배를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통치성’(governmentality) 기획의 연장선 안에 있는 것이라고, 브라운은 본다. 관용은 좋은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이 왜 좋은 것이지, 혹은 왜 좋은 것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묻지 않는 동안 관용은 통치자의 도구로 전락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 담화문을 읽어보시라. 우리나라 정치인들 입에서는 주로 ‘경제’와 ‘국민’이라는 낱말만 들리는 것 같아 좋은 예시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서방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인들의 입에서는 ‘인권’, ‘평화’, ‘환대’, ‘정의’, ‘관용’, ‘대화’ 등 좋은 말들이 더 자주 들린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낱말들에 담긴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지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정치가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 아닌가? 그저 도구적으로나마 저 낱말들의 의미를 실현하는 데 힘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통치의 주체들은 자기의 권력과 이익에 보탬이 되는 한에서, 통치의 전략으로서의 유용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한에서만 저 ‘좋은’ 낱말들을 그들의 ‘올바른’ 정치적 담화 안에 적절히 수용해 내는 것이다. 브라운의 비판은 저렇게 좋고 올바른 말들이 어떻게 통치기획에 복무하는지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비폭력이 더 효과적인 저항의 수단이라는 말씀에 동의하고, 연구결과로까지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니 감사하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폭력’마저도 승리를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와 유용성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게 종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폭력’은 더 잘 ‘이기는’ 수단이라는 게 입증되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지는’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종교의 남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 전철후: 발제자의 말에 동의한다. 종교인이 평화활동에 참여할 때에는 신앙과 정신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자기 내면에서부터 깊은 신앙과 수행심이 바탕이 되었을 때 스스로가 내려놓음으로써 무조건적인 비폭력저항운동을 선택 할 수 있고, 방법론적인 비폭력저항운동이 아닌 자기 수행의 실천으로서의 참된 비폭력저항운동에 참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길희성 교수께서 “현대의 다원주의는 ‘실천적 다원주의’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씀한 것을 기억한다. ‘실천적 다원주의’는 ‘정의와 해방에 헌신하는 도덕적 실천의 차원’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깊은 신앙과 수행체험에 바탕을 둔 경험과 실천의 대화적 공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평화를 말하려는 종교인들은 영적인 사유의 폭과 깊이를 추구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왜 참다운 종교는 무조건적 환대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향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에 뛰어들기를 반복하는가?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는 않으려고” (이성복)



문학이 종교적 영성을 자극하다


- 이찬수: 전 교무님 지적처럼 평화가 영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본다. 발제자가 인용한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문학이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고, 그것이 종교가 취해야 하는 형식이라면, 영성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종교가 통한다고 할 때, 문학과 종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실패의 형식이 아닌, 실패의 내용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 홍정호: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문학과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철학적 신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지금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건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안 ‘계신다’는 데 강조점이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그분이 계시고 안 계시고의 구분을 떠나, ‘신’이 더 이상 ‘존재’에 관한 철학적 논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존재’로서의 ‘신’의 죽음의 시대(the age of the death God)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 ‘존재’에 관한 철학적 논의로부터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신’에 관한 ‘학’이 새로 찾은 보금자리가 예술, 특히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은 ‘존재’로서의 ‘신’의 죽음 이후 신학적 사유를 전통적 형이상학의 용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그러나 그 일상어의 다른 쓰임을 통해 수행하는 ‘신학 이후의 신학’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복 시인의 저 말은 특히 ‘신학적’으로 느껴진다. ‘존재 없는 신’(God without Being)의 종교성이 짙게 배어 있는 말로 들린다.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는 시도야말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종교가 여전히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그분이 성공하는 사제의 길을 마다하고 자발적 몰락의 길을 선택해서 갔기 때문이 아닌가? 거기에는 형이상학이 없다. 있어도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종교가 “비참하게 깨져도 한심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발적 몰락의 길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면, 이 시대 종교의 쓸모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 영화 <울지마, 톤즈> 중


- 이찬수: “한심하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종교인의 자존심이야말로, ‘자존심’이라는 낱말의 뜻 그대로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아닐까?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려는 마음을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 홍정호: 종교는 내면의 투쟁이 아닌가? 신념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신념을 벗어버리기 위해 남모르는 자기 내면과의 씨름에 나서는 것이 종교를 종교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존심’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이때의 자존심이란 ‘나를 낮추면서 높아지는’ 역설이 되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불교를 공부하는 분에게서 ‘하심’(下心)이라는 낱말을 배웠다. ‘하심’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려는 마음이다. 종교인이 지켜내야 할 ‘자존심’이란 결국 ‘하심’이 아닌가? 더 낮아지기 위한 분투이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나는 타자의 ‘볼모’라고 생각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나를 낮추면서만 높아지는 길, 아니 높아지고 싶은 마음 자체를 버리면서 끝끝내 자기를 낮추는 길이야말로 종교에 입문한 사람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 안에서 불교를 넘어


- 원익선: 발표를 들으면서 불교와 비슷한 이야기가 참 많다고 생각했다. 단어 몇 개만 바꾸면 이건 완전히 불교 이야기구나 싶은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레비나스를 언급하셨는데, 혹시 레비나스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양 철학의 존재론적 전통과의 대결에 나서는 이분의 말이야말로 불교적인 가르침과 통하는 내용이 많은 것 같다.


타자의 문제는 불교가 그동안 해결하려고 매진해 온 문제이다. 마음 외에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유식사상(唯識思想) 같은 경우 철저히 자아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식과 말라식과 아뢰야식의 문제가 대승불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불교는 개인 차원에서의 해체인가, 사회적 차원에서의 해체인가를 물을 뿐 근원적으로는 자아와 사회의 해체를 지향한다. 초기 불교가 해체를 개인적 차원에 국한해서 말했다면, 대승불교적 차원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해체의 문제까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타자 환대의 문제라든가, 실패를 자기화하는 방식 역시 불교에서 지향하는 해체에 관한 과정철학적 접근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자아란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과거에 매여 있지는 않기에 해체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있는 순간 그대로를 바라보고,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순간에 새로운 카르마를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마침내 실패하는 삶”에 이르려는 건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에 속한 과제이다. 


- 이찬수: 종교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고 정의하려는 시도 속에 동·서양 종교의 차이가 묻어있다.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을 왜 굳이 표현하려고 하는가? 종교를 이렇게 정의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의 목적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지금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그 의미가 드러나고야 말리라는 종말론적 희망이 배어있는 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발제자가 레비나스를 인용해 말한 ‘자아론’(egology)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서양종교의 목적론적 사고의 틀에서 ‘자아론’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어려운 과제일 것 같다.


또한 “끝없이 실패하는 삶”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인식 역시 불교와 대조적이다. 불교철학적 세계관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궁극적이지 않다. 성공과 실패는 오직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에 기독교 안에는 시간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어느 ‘때’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불교는 시간론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철학적으로 약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다른 사유와 실천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의 상이한 시간론은 ‘비판적 저항’과 관련한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빚어낸다. 기독교는 지금 안 되도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항의 현장에 뛰어들지만, 불교는 그런 희망론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사회참여의 형태도 약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성을 앞서 원 교무님이 지적하신 ‘사회적 해체’의 맥락과 연결시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불교가 자아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를 해체한다고 이야기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불교가 평화를 이루는 방식


- 원익선: 일종의 연기론이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다. 불교의 사회적 연기라는 것은 타자 속에 이미 내가 속해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사회적 연기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농부 속에 정치인이 있고, 정치인 속에 농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부모 속에 자식이 있고 자식 속에 부모가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 관계성 안에서 서로 의존하면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폭력이나 평화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공적으로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공적인 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죽음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불교의 기본적인 사유이다. 불교의 연기론이 사회의 해체는 이렇게 사회 안에 있는 생명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해체를 사회적 해체와 연결짓는다. 


- 이찬수: 평화는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측면까지 포함한다. 평화학에서도 평화를 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피스키핑(peace-keeping, 평화유지), 피스메이킹(peace-making, 평화조성), 피스빌딩(peace-building, 평화구축)이다. 더 큰 힘이 작은 힘들을 압도하거나 견제하고 있어서 당장은 더 이상의 폭력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가 피스키핑의 상태이다. 이러한 피스키핑을 조약이나 협상을 통해 좀 더 안정적으로 확보해보려는 태도가 피스메이킹이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사회적 구조, 문화 자체까지 평화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피스빌딩이라고 한다. 이른바 평화문화 혹은 문화적 차원에서 평화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업의 공적 카르마라는 자세에서 불교적 피스빌딩의 근본적인 자세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불교적 세계관은 실제로 어떤 식으로 폭력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폭력을 극복하려다 보면 비판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비판은 저항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저항에는 사회성이 있어야 하는데, 불교는 개인 안에서 시작해 개인 안에서 완성하려는 경향이 크지 않은가.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가 피스빌딩에 공헌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 원익선: 일종의 ‘사회적 부디즘’이라고 할 있는 참여불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원불교를 참여불교의 하나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불교 공부를 해 보니 불교는 역설적이게도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철저하게 자기로부터 시작한다. 사회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불교에 보면 계율들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자기를 제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사회로 확산해 나가는 순서이다. 예를 들어 ‘도둑질 하지 말라’는 건 개인에게 우선 적용되는 계율이지만,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면 ‘후손들이 나중에 써야 할 사회적 자원을 당대에 다 쓰지 말라’는 적극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하는 불교를 어떻게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면서 실천을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것이 참여불교가 고민하는 과제이다. 


- 전철후: 불교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는 가능성이 한국에서 자생된 신종교의 정신문화인 것 같다. 한국의 신종교 창시자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까지도 다루었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내면 세계 뿐만 아니라 가정, 국가, 세계의 평등과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서 모든 만물을 천지, 부모, 동포, 법률로 보고 존재론적으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연기적 생명의 관계로 규범하면서 ‘은혜’의 관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평등한 인권을 토대로 해결하려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 현실 속에 있는 종교가 평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평화를 내세우는 종교인이 도리어 폭력에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종교 및 평화 연구자들이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진단하고, 종교의 초라한 실상을 폭로하면서, 평화를 상상하는 토론을 벌였다. 모임 이름은 “레페스 포럼”. 레페스(REPES)는 REligion and PEace Studies의 약어이다.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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