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란 단어를 나는 별로 쓰지 않는다. 영성이란 단어는 현실과 관계없는, 오직 하느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뜻하는 것,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특별한 신분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 성당, 수도원 등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실천을 제외한 지적 신비적 묵상적 차원의 것으로 자주 오해되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단어가 분별없이 쓰여 지기도 하고, 영성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오해되기도 하고, 영성이 신앙을 평가하는 제1 기준으로 과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영성이란 단어를 써야 한다면, 나는 영성보다 예수 따르기란 단어를 추천하고 싶다.‘누가 영성이 있네 또는 없네’라는 표현보다 ‘누구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네 또는 엉망으로 따르네’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신앙을 평가하는 제1기준은 영성이 아니라 예수 따르기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예수는 영성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예수는 죽음 이후의 문제나 죽음 자체에 대해서도 별로 말하지 않았다. 성서는 대부분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을 주로 다룬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삶을 다루는 종교다.
그런데 삶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가난은 죽음 이전에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이다. 순교가 갑작스런 죽음을 가리킨다면 가난은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이요, 천천히 진행되는 순교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인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아무 응답도 하지 못하는 신학이나 종교를 어디다 쓸까.
예수의 상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전한 말씀과 행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었다. 예수의 복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에게만 전해졌다고 독일 성서학자 예레미아스는 말할 정도다.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헌은 가난,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로 복권시킨 데 있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치며. 그분이 예수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왜 부자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하느님은 왜 가난한 사람을 하느님 자신의 몸으로 선택했을까.
하느님 특징 중 제일은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백성을 해방시키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예수라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자리가 성서에 아예 없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할뿐더러,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사회복지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윤리적 개념에 불과하지 않고 더 큰 신학적 가치를 지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적절한 언급처럼 가난은 경제적 범주가 아니라 신학적 범주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식론적 계기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그리스도교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놓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그리스도교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놓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이 존재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자리다.
신약성서에서 신 존재증명은 따로 없다. 하느님이 이미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을 두고 어디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서 교회가 일어서느냐 넘어지느냐 결정 된다"는 해방신학자 소브리노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교가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교회가 넘어질 뿐더러, 하느님을 아는데 실패한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알 방법이 없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영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현실 속에 있다. 그래서 영성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 현실과 나의 관계, 가난한 사람들과 나의 관계 등 3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만 집중하는 영성은 존재할 수 없다. 영혼에만 관심 갖는 인간이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영성은 주로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만 집중되어 왔다.
영성이란 용어를 넓게 보아야 한다. 현실을 떠난 영성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영성은 없다. 영성이 신학적 도피수단이나 아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영성을 지닌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불의한 세력에 적극 저항한다. 불의한 세상을 보고 침묵하는 사람에게 영성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