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에 대해
로메로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은 1977년 3월 12일 밤, 바로 그날 밤이었다. 보름 여 전에 산살바도르 교구장이 된 로메로 대주교는 그의 오랜 친구인 예수회 류틸료 그란데 신부의 피살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그란데 신부가 그를 마차에 태워줬던 노인과 7살 소년과 함께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었다. 진보적인 그란테 신부는 당시 특히 가난한 농민들의 협동조합 조직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고, 이미 군사독재정권의 제거대상에 올라있었다.
로메로는 전부터 교회가 단순한 교계제도나 로마 바티칸, 신학자나 성직자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민중이 곧 교회임을 피부로 경험했고, 선언했다.
“신은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들 그 자체를 원합니다. 가난한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방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단순히 정부나 교회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해방을 위한 자신들의 투쟁에서 주인이자 주인공이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는 현장보다는 서재를 더 좋아해 ‘책벌레’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란데 신부 사건 이후 우선 교회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오직 예수’를 부르짖지 않더라도 공동선을 위해 같이 일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불의한 환경에서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즉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순수하게 흠 없이 자신을 유지하려는 교회는 민중을 섬기는 하느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생각인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호감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배재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교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매춘부와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와 다양한 정치적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하는 것을 언짢게 여겨서는 안 된다며 그들과 소통했다. 한 마디로 당시 일반적이었던 교회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교회는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그 이유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니까 모든 신부가 박해를 받거나, 모든 교회가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려는 교회가 공격과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박해 받는 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단어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가난이라는 것이다. 1980년 2월 2일, 벨기에 루벵 가톨릭대학 연설에서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라는 생각은 대주교가 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엘살바도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농민이었다. 1976년 11월 사목교서에서 그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커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 언급했다.
신은 모든 창조물을 인류 전체가 사용하도록 창조했고, 창조된 부는 정의와 박애의 정신아래 올바르게 이용되어야 하는데, 일꾼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볼 때마다 슬픔을 느낀다고 한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느냐며 성서 구절을 들려줬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밴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 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 5장 4절)
교회는 신의 명령에 따라 울부짖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