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6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놓을 것이 있어야지.' 하고 사정을 한다면 7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입니다. 8 잘 들으시오.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9 그러므로 나는 말합니다. 구하시오, 받을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시오, 열릴 것입니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11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12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3 여러분이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카 11,5-13)
앞 단락에서 예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이제 기도의 자세를 설명하면서 실제로 기도하라고 격려한다. 5-10절에서 기도의 자세를, 11-13절에서 기도에서 받는 선물을 소개하고 있다. 5-8과 11-12에서 예수는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비유를 들고 있다. 구하다(9,10,11,12,13), 주다(7,8,9,11,12,13) 두 동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남자의 기도를 보여준 오늘 단락은 여자의 기도를 보여준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에 대응한다(루카 18,1-8). 5절 ‘여러분 중 누가’는 예수가 즐겨 쓴 말투 중 하나다(루카 11,11; 12,25; 14,28; 15,4). 예수의 말투를 따라 하는 재미가 성서공부에서 얻는 즐거움 중 하나 아닐까.
예수의 비유가 심상치 않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요청한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먼 길을 가다가 집에 들린 친구에게 그는 내놓을 빵이 없었다. 왜 빵이 없었는지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다. 당시 시골 농부들은 매일 빵을 구웠을까 아니면 일주에 한번 구웠을까. 일주에 한번 구웠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신약성서에 드물게 보이는 동사 빌려주다는kikremi 친구 사이에 이자 없이 빌려주고 돌려받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왜 빵 세 개를 청했을까. 빵 세 개는 1인분 한끼 식사에 해당하는 것 같다. 시리아 지역에서 만들어졌던 작은 빵 같다(Bovon, 2, 149).
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는 친구에게 얼마나 죄송하고 속상했을까. 자존심 팽개치고 방문한 친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기 위해 한밤중에 다른 친구 집을 찾아나섰다. 요르단이나 이집트 사막지역에 사는 베두인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밤시간에 즐겨 이동한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유다인에게 한밤중에 친구를 방문한 비유는 놀랄 일이겠다. 밤은 손님 방문보다 도둑의 활동에 더 어울리는 시간이다(마태오 24,42-44; 테살로니카전서 5,2; 요한묵시록 3,3).
출입문이 하나 있는 단층 시골집을 연상하면 좋겠다. 문은 방안에서 잠그고 푼다. 문을 열 때 어느 정도 소음은 피할 수 없다.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다니, 무슨 뜻일까. 단칸방인 집이라서 온가족이 한방에 자고 있는 것 같다. 큰 침대에서 양쪽에 누운 부모 사이에서 잠든 아이들을 상상해보자. 아이들을 깨울까 조심하는 아빠는 찾아온 친구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 같다. 그래도 찾아간 친구가 계속 간청한다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사실 친구는 세 가지를 거부한 셈이다. 일어나기 싫었고, 문을 열기 싫었고, 빵을 빌려주기 싫었다.
8절 귀찮게 졸라댐은anaideia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 단어는 여기서 도덕적 품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노력을 가리키는 것 같다. 9절 ‘청하다-받다’ 대응은 구약성서에 익숙하다(역대기하 1,7; 시편 2,8; 36,4). 요한 11,22; 15,16; 야고보 1,5에도 보인다. ‘구하다-찾다‘ 대응은 신명기 4,29; 이사야 65,1; 잠언 8,17에 보인다. ’두드리다-열린다‘ 대응은 루카 13,36; 사도행전 12,13; 요한묵시록 3,20에서 볼 수 있다.
13절에서 하느님과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마르코 10,18; 마태오 12,34; 루카 18,19). 제자들이 도덕적으로 저조하게 평가되거나 인간에 대한 비관적 진단을 하는 것은(Bovon, 2, 155)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차원이 다름을 강조할 뿐이다. 루카는 예수가 떠난 이후 공동체 사정을 생각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계속 꺼내고 있다(루카 12,10; 11-12). 루카는 기도를 의무처럼 가르친 것이다. 마악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기도하는 습관은 없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기도에 맛들이도록 격려하고 싶었다.
11-13절은 두 주제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1. 하느님은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2. 하느님께 기도에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이 비유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고 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처럼, 하느님은 인간에게 베푸시는데 게으른 분이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는데 게으를 뿐이다. 하느님을 상정해야만 인간의 본질이 비로소 드러난다. 하느님 없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예수는 자기 먹을 빵을 구하려 친구 집을 방문한 비유를 들지 않았다. 친구에게 먹이려는 빵을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말문이 막힌다. 나를 찾아온 친구를 위해 내 집에 없는 빵을 구하려 한밤중에 친구를 방문하여 잠 깨우고 빵을 요청할 용기가 내게 있을까. 부끄럽다. 밤중에 느닷없이 깨워도 덜 미안할 친구가 내게 있는가.
생선을 달라는 자식이라니, 무슨 뜻일까. 유다인들이 주식인 빵과 곁들여 먹던 반찬격인 생선을 가리키겠다. 빵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반찬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가난한 자녀들의 얼굴과 그 애처로운 눈길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느껴진다. 가난한 가족의 일상을 예수도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예수는 가난한 부모와 가난한 자녀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마치 예수의 애처로운 눈길을 보는 것 같다. 성서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만든다. 교회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부모와 가난한 자녀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가.
생선과 뱀은 그 모양이 비슷하다. 달걀은 웅크린 모양의 전갈과 비슷하다. 뱀과 전갈의 위험은 성서에 소개되어 있다(루카 10,19; 시편 91,13).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는(마태오 7,9) 루카에 없고, 마태오에 없던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루카 11,13) 부분이 추가되었다. 루카는 사람의 악함과 하느님의 선함을 대조하면서 하느님이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생선과 달걀 같은 먹을 것뿐 아니라 무려 성령까지 주시는 하느님을 예수는 가르쳐주었다. 기도는 결국 하느님과 인간의 각별한 관계에 그 근거와 이유가 있다.
루카는 기도를 의무처럼 가르쳤다. 마악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기도하는 습관은 없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기도에 맛들이도록 격려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친구가 있는가. 배고픔에 시달리는 내 가족을 위해 곳간을 열어줄 친구가 있는가. 우정만으로 빵을 내어주진 않겠다는 구절에서 예수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보아야 하나. 우리는 악한 부모임을 먼저 인정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슬픈 모습을 성서는 암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가. 지금 우리에게 부모 자격이 많이 부족한지 모르겠다. 부모도 제대로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를 따를까. 신앙은 둘째 치고 상식이라도 어서 갖추어야 할 형편이다. 하느님 공경을 꿈꾸기는 커녕 사람이라도 제대로 되어가야 하겠다.
기도를 당당하게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는 어쩐지 합리적인 사람들과 지식인과 거리가 먼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는 미성숙의 표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를 업신여길 필요는 없다. 기도를 요술방망이나 만병통치약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는 미신이나 주술과 아무 관계없다. 기도는 악한 사람을 위한 알라비아도 아니요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핑계도 아니다.
현대인은 여전히 기도할 수 있는가. 자의식이 강하고 독립정신이 투철한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가. 기도는 의존적인 열등감의 표현인가. 기도와 자립은 정비례로 상승한다. 참으로 자립적인 사람이 기도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립적일 수 있다.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그만큼 나는 당당하게 자립적일 수 있다. 자립적인 그만큼 나는 하느님께 기꺼이 의지한다.
기도에 대한 이론적 분석보다 실제로 기도하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 기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기본이다. 나는 기도할 수 있다. 기도를 거부하기에 마땅한 이유가 산더미처럼 많아도 나는 하느님께 겸손되이 기쁘게 무릎꿇을 수 있다.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과 주도권을 흔쾌히 인정한다.
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인간은 당당히 기도할 수 있다.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다. 기도 없이 인간 없다. 인간만 기도할 수 있다. 인간은 기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한다. 인간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면서 인간 자신을 만난다.
아무 기도나 하느님이 들어주시지는 않는다.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격려에는 기도를 정화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악한 기도는 이미 무효다. 이기주의에 갇힌 기도는 당연히 배신당한다. 부패에 물든 사람이 하는 못된 기도는 반드시 거부당한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라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 빵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친구를 위해 비는 것이다.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쁘게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는 보여주었다.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해서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이다. 기도는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 없이 참된 기도 없다. 기도는 자기 안에 숨는 것이 아니다. 가짜 기도는 우리를 자기 안에 꼭꼭 숨도록 유혹하지만, 진짜 기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다가서도록 안내한다.
예수는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최소한 먹을 것을 하느님께 당당하게 간청할 권리가 있다. 굶고 있는 인간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권리가 인간에게 교회에게 없다. 교회는 가난할 의무는 있어도 부자될 권리는 없다. 배고파서 훔친 음식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얼마전 이탈리아 법원에서 있었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예수의 기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선물한 기도다. 우리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가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