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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56 : 예수와 악마
  • 김근수
  • 등록 2016-11-24 11: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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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 하나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벙어리는 곧 말을 하게 되었다. 군중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5 그러나 더러는 "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으며 16 또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입니다. 18 여러분은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19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면 여러분의 사람들은 누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까? 바로 그 사람들이 여러분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지적할 것입니다. 20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21 힘센 사람이 빈틈없이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는 한 그의 재산은 안전합니다. 22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무찌르면 그가 의지했던 무기는 모조리 빼앗기고 재산은 약탈당하여 남의 것이 될 것입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입니다.
24 "더러운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거기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쉼터를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25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26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잡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됩니다." (루카 11,14-26)




예수뿐 아니라 초대 교회 선교사들도 여러 종류의 반대에 직면했다. 예수가 마술을 부리고 있다는 의심은 오래된 것 같다. 예수와 제자들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해명하고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시대적 사회적 상황이 오늘 단락을 낳게 한 배경인 것 같다. 


루카 11,14-12,12는 예수와 적대자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예수와 악마가 맞서는 오늘 이야기는 마르코 3,22-27를 대본으로 삼았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7-20는 예수는 어떤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느냐 묻고 있다. 누구 힘이 센가를 다루는 21-23절에 이어 추방된 악마의 복귀 야욕을 말하는 24-26이 소개되고 있다. 전형적인 마귀 추방 이야기와 달리 마귀를 쫓는 자세한 상황이 설명되진 않는다. 마귀 쫓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마귀를 쫓는 예수의 능력과 신분에 대한 질문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헐뜯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마르코 3,22),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마태오 12,24). 루카는 군중 속의 어떤 사람으로tines 소개한다. 마귀를 추방하는 예수의 행동에서 예수의 능력뿐 아니라 예수의 신분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마귀를 쫓아낸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적대자들은 예수를 악마와 한편이라고 비난하였다. 나쁜 의도에서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루카는 이 요구를 마르코 8,11에서 빌려왔다(역대기하 20,8-11; 이사야 7,11; 38,7-). 놀랍게도 예수는 정치와 군대의 경우를 들어 자신을 변호한다. 분열된 나라와 가문은 저절로 멸망한다는 것이다.


유다교 문헌에 베엘제불 이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에크론이라는 지역에 필리스터인들이 믿는 바알제불이라는 신이 있었다. 아하샤왕이 신탁을 받아오는 신으로 알려졌다. 그 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졌다. 어원으로 보면 ‘높은 곳에 사는 주님’이라는 뜻이다. 구약성서 역대기하 1,2-16에 베엘제불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 시대에 그 이름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같다(Bovon, 3/2, 171). 이방인들이 믿는 신들은 유다교에 의해 악마로 이해되었다(시편 95,5). 마태오 10,25에서 집주인oikodespotes 이름으로 나온다. 베엘제불은 악마의 두목으로 여겨졌다. 예수가 왜 베엘제불 이름을 언급했는지는 수수께끼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라는 17절 예수의 말씀에 내 가슴이 멍하다. 예수가 마치 우리 한민족에게 하는 경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의 내전이든 그 민족을 망하게 한다. 한국전쟁, 엘살바도르 내전, 수단 내전, 시리아 내전 등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슬픔이 앞선다.


예수 자신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는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고 있으니 사탄의 나라가 멸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19절 여러분의 사람들이 오히려 악마와 관계있지 않느냐고 예수는 반박하고 있다. 유다인들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고 있다고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으로(탈출기 8,15; 시편 8,4) 행해지는 예수의 마귀 추방에서 하느님나라를 보지 않는 그들이다. 20절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능력(손가락, 탈출기 8,15; 31,18; 신명기 9,10)으로, 하느님의 영으로(마태오 12,28)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예수는 마귀 추방에서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갈라디아 2,21; 3,29; 히브리서 12,8).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나라는 예수에게서 실현됨을 또한 보아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예수의 관점에서 보고, 예수를 하느님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와 예수의 상호관계를 비중있게 강조하는 그리스도론 책은 흔하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론 저작들은 하느님나라보다 예수에게 더 집중하였고 하느님나라와 예수의 관계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발터 카스퍼의 책 ‘예수그리스도’가 그렇다. 카스퍼의 책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소브리노의 책 ‘해방자 예수’는 하느님나라와 예수의 관계를 중요하고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예수의 마귀 추방을 하느님나라와 연결하지 않고 예수의 신분에만 제한하여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예수의 생각 말이다. 그런 잘못을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마귀 추방을 먼저 하느님나라와 연결하고, 그 기초에서 예수가 누구인지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에만 집중하고 하느님나라를 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다.


예수는 자신을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하느님나라는 서서히 망각되고 오직 예수만 전해지고 말았다. 예수와 하느님나라의 관계가 소홀히 여겨지고 하느님나라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중재자인 예수는 중요하게 기억되었지만, 중재인 하느님나라는 마치 부록처럼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하느님나라는 서양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례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된 4세기부터 18세기 말 프랑스혁명까지 천년 넘게 하느님나라는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에 성서신학이 하느님나라의 중요성을 다시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20세기에 해방신학은 하느님나라를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로 드디어 회복시켰다.


21-22절에서 예수는 군대에서 쓰는 병법을 알았을까. “적장에게 사로잡힌 사람을 빼낼 수 있느냐? 폭군의 손에서 포로를 건져낼 수 있느냐?”라는 말씀을(이사야 49,24) 기억한 것 같다.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 전문가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23절에서 예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선포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나라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태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결정하는데 관건이 된다. 예수에 대한 태도는 하느님나라를 대하는 태도와 직접 연결되고 있다.


악의 세력에 대해 어떤 자세를 택할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죽고 사는 문제에 해당한다. 예수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악의 세력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문제다. 성사, 전례, 교회 출석, 신자들의 의무 등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대한 태도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핵심 주제인 것이다.


24-26절에서 예수는 사탄의 세력에게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설명하고 있다. 악마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려고 한다(마르고 9,25). 인간은 악마가 머물기 좋은 집이다(코린토후서 5,1-). 악마와 싸우지 않는 사람은 악마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간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자청해서 악마와 동거하는 셈이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악마가 주는 고통에 시달린다는 뜻이다. 악의 세력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악에서 오는 고통에 하소연할 자격이 없다.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임은 악의 세력에 저항하고 싸우겠다는 결심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우지 않겠다는 말은 모순이다.


악의 세력은 한번에 물러가진 않는다. 악의 세력과 다툼은 끈질기게 계속 해야 한다. 선은 반드시 악을 이기지만, 선이 악을 언제 이길지 알 수 없다. 악의 세력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악과의 싸움은 오랜 시간 적지 않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악은 언제나 우리의 빈틈을 노릴 것이다. 25절은 그것을 말해준다. 악마를 쫓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마가 물러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악마를 물리쳤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마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믿고 악마와 싸워야 한다.


우리 시대 악마는 누구인지, 누가 악의 세력에 속하는지 궁금하다. 악마는 넥타이를 하고 고학력을 자랑하고, 복잡한 사회 구조에 숨어 있으며, 친절한 모습을 하고 자신을 천사처럼 위장하고 있다. 악마를 알아볼 수 없게 방해하는 책, 언론, 정보, 조직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누가 악마의 편인지 제대로 알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악마를 알아차리는 기준은 결국 두 가지다. 1.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따르는 것이다. 2.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느님나라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악마의 편이다. 불의를 보고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악마의 편이다. 불의를 보고 저항하지 않는 교회는 예수가 아니라 악마에게 봉사하고 있다.


요즘 말로 예수는 악플에 시달린 것일까. 각종 소문에 예수의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예수를 신학적으로 이단 취급하고 종교적으로 따돌림 시키려는 작전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진짜 예언자들을 악마의 세력이라고 헐뜯기 마련이다. 적대자들은 자기들 신분을 자백하는 셈이다. 이단이니 뭐니 하며 사람을 종교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악한 사람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예수가 악마와 손을 잡고 유다교를 분열시킨다고 에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교 쇄신을 부르짖는 사람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수법이 예수에게도 적용되었다. 예수에게 이단 누명을 씌워 예수의 활동을 막아보려는 수작이다. 교회 쇄신을 부르짖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지금도 흔하다. 교회 쇄신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잔꾀를 부리는 사람들이 사실 악마와 연관되어 있는데 말이다.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말에 속지 않는 신자. 통일교육을 하는 본당. 남북 화해를 위해 애쓰는 교회. 이런 모습이 한국천주교회에 좀더 뚜렷하게 보이길 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분명하게 깨닫고 살진 못한다 하더라도, 남북분단은 한민족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틀이다. 분단은 종교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기본 요소다. 분단을 의식하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제대로 된 신학을 하기는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분단 문제가 한국가톨릭교회의 관심에 깊이 들어와 있을까. 분단은 한국가톨릭교회에 아픈 가시인가, 눈에 가시인가. 한민족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경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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