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0일부터 25일까지 5박 6일간,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동북아시아 크리스챤 화해 포럼>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크리스챤 화해 포럼>은 오래 전부터 세계 평화 공동체 구축에 매진해 온 매노나이트(mennonites - 재세례파)가 주축이 되어, 역사적 분쟁지역이었던 아프리카와 동북아시아에서 신앙인들이 모여 평화와 화해 활동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동북아시아 포럼은 한국(남한과 북한), 중국, 일본, 홍콩(차이나)에서 온 신학자들⋅평화활동가들의 모임으로, 2014년에는 한국 가평에서, 2015년 올해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나가사키 화해 포럼>에 한국에서는 제주교구장이신 강우일 주교님, 최혜영 수녀님(성심수녀회), 박문수 신부님(예수회), 저를 비롯한 평신도 3명이 참가했습니다. 강우일 주교님의 특별 강연 내용을 번역해 올립니다. 한국⋅중국⋅일본⋅그 밖의 동북아시아 모든 나라들의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고 호혜적인 연대를 희망하는 주교님의 글,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희망을 추구하며
2015년 4월 23일
나가사키 크리스챤 화해 포럼에서
발표 :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요한 20,1-10)
지난 달 나는 제주에서 서울로, 다시 로마로 여러 차례 여행을 해야 했다. 로마에 들렀다가, 미국 의회 방문을 위해 다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 의회를 방문한 이유는 제주 4⋅3 사건 관련 모임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2014년 한국에서 열린 크리스챤 화해 포럼에 참여한 분들은 내가 4⋅3 사건에 대해 언급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1948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서 무고한 아이들과 노인들 포함해서 3만명 넘게 사망했다. 그 때 나는 4⋅3 사건은 정부가 보낸 군대와 우파 민병대가 어떠한 조사나 법적 재판 절차도 없이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거라 말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북한은 소련에, 남한은 미국에 의해 3년간 점령되었다. 분단은 한국 전역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반목을 가져왔다. 당시 매우 빈한한 섬이었던 제주는 식량과 일자리 부족으로 심각한 사회적 불안정을 겪고 있었다.
일본에 거주하던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제주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은 시위대에 난폭하게 대처하며 발포하여 어린이 2명을 비롯한 6명의 민간인을 사살했다.
1948년 3월 3일 이른 아침, 한 좌익 집단이 12곳의 경찰서를 습격했다. 이에 미군은 좌익 운동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소탕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제주에서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수의 한국 군대와 민병대를 보냈다.
그들은 불을 지르고 파괴하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면서 고지대 마을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학살은 한국 군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명령을 내린 것은 미군 장성들이었다. 제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그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빨갱이 섬이고, 지역민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제거해야 할 빨갱이 폭도에 불과했다.
당시 임시 행정권을 쥐고 있던 미군 지도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추진된 이 끔찍한 학살 사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의 화해와 치유를 위한 협력적인 여정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내가 미국 의회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 하원과 상원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방문 의도를 밝히면서, 나는 미국 의원들에게 한국 정부가 내놓은 4⋅3 보고서(영문판)를 전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의 한 작은 항구에, 한국 해군은 현재 어마어마하게 큰 해군 기지를 건설 중이다. 항공모함을 포함한 20척의 첨단 전함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다.
알다시피, 항공모함은 대양을 가로질러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전함인데, 한국의 제한된 국방예산으로 그렇게 거대한 전함을 소유하거나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난 8년 동안 많은 평화 운동가들이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다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고 벌금을 물어야 했다. 나는 해군 기지 건설 계획에 맞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정부 인사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는 등 갖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지 건설이 우리 정부만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미 군사 협정에 따라 미군은 한국 정부에게서 아무런 사전 허가를 받지 않고도 한국 군사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최근에 미국 정부는 외교부와 국방부 채널을 통해 한국에 미국의 미사일 방어 전략인 싸드[THAAD : Terminal High Area Defence]를 설치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 정부는 싸드 설치가 동북아시아 평화를 심각하게 위험에 빠뜨린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일본 아베 정권은 아시아 각국에 개입했던 과거의 행태를 재천명하고, 자위대 법을 수정하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합법화하려 하고 있다. 직접적인 공격은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본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지위를 얻으려는 수순이다.
이 모든 국제적 정치 환경으로 보건대, 과연 세계에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런 현실에서 평화 구축은 가능하기나 할까?
지난 달 미국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노부인이 15년 전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겪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춥고 눈이 내리던 어느 날, 그 노부인은 남편과 함께 낡은 폭스바겐을 타고 장을 보러 나갔다.
쇼핑몰로 향하던 중, 교차로에서 신호등에 걸리자 이들은 차를 세웠다.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을 겪은 부인의 남편은 뭐든 아끼고 절약하는 사람이어서, 교차로에 차를 세울 때마다 가솔린을 아끼기 위해 엔진을 끄곤 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남편이 차를 다시 출발시키려 했으나 추운 날씨에 배터리가 방전되었는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재시동을 걸었지만, 배터리는 점점 더 약해졌다. 뒷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자, 두 노인은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아직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몇 분 뒤, 한 젊은이가 차에서 내리더니 노인들의 차를 길 가장자리로 밀어내도록 도와 주었다. 그리고는 두 노인을 자기 차에 태웠다. 이미 두 노인은 난방도 나오지 않는 차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젊은이가 몇 번인가 노 부부 차의 시동을 걸어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더니 그는 바로 근처인 자기 집으로 가서 정비소에 전화를 걸어 노부부의 차를 견인해 가게 하겠다고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젊은이는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와 집에서 방금 구운 쿠키를 들고 돌아왔다.
자기 차에서 따뜻한 커피와 쿠키를 먹고 계시면 30분 내로 사람이 와서 차를 견인해 갈 거라고 했다. 견인차가 올 때까지 그 젊은이 역시 노부부와 함께 기다려 주었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견인차가 와서 폭스바겐을 정비소로 끌어갔다. 젊은이는 자기 차를 몰고 정비소까지 동행해 주었다. 정비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뒤, 그는 노부부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한국인 노부부는 이 젊은이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젊은이의 친절하고 사려 깊은 행동에 감탄하기도 하고 크게 감동을 받은 노부인은, 바로 그 순간에 형제애와 따뜻한 마음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이 나라로 이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며칠 뒤 노부부는 젊은이의 어린 딸에게 줄 작은 선물을 챙겨서 젊은이의 집을 방문했다.
미국에 대한 내 시각을 바꾸어 놓은 것은 바로 이 예상외의 일을 통해서였다. 이전에 나는 미국에 대해 약간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는데, 미국에도 선의와 형제애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에서도 희망의 표지를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12월 시애틀에서 예수회 빅스 신부님(Fr. Bicx)과 함께 반핵운동가 몇 분이 제주를 방문했다. 9명의 운동가들은 해군 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강정마을에 열흘 정도 머물렀다. 이들은 강정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들의 비전과 활동을 한국인 평화운동가들과 공유했다.
빅스 신부님의 제주 방문은 두 번째였다. 유감스럽게도 빅스 신부님은 2015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빅스 신부님은 평생 탈핵 활동에 헌신하셨다. 신부님이 89세의 연세로 제주를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만류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제주교구장인 내가 해군 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나 역시 태평양을 건너 그토록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제주를 찾아 주신 것에 깊이 감동받았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제주에 와서 안락한 호텔에 머무는 대신 우리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소박한 농부의 거처에 머물렀다. 그 행동만으로도 강정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평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우리와 연대하여 전쟁 반대를 표명하기 위해 강정을 방문했다.
내가 미국 의회를 방문했을 때, 의원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하와이 대학교 법대 교수인 일본계 미국인 에릭 야마모토씨였다. 야마모토씨와 우리를 만나게 해 준 사람은 홋카이도 대학의 일본인 교수 요시다씨였다. 요시다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만남에 참여하면서, 제주 4⋅3 비극과 관련된 미국과 한국 사이의 화해와 치유 프로젝트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싶어 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두 나라는 지리상으로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6세기 말, 일본군은 6년간 한국을 침략하여 수십만의 사람들을 살상했다.
이 전쟁은 모든 한국인에게 이후 몇 세기 동안이나 잊을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근대에 들어 일본은 1910년에서 1945년까지 36년 동안이나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 전역은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노역이나 군대로 징용되거나, 또 성 노예로 끌려갔다.
일본 교육체계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일본 영토 밖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거의 가르치거나 묘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한번은 어떤 일본인 그리스도인이 나에게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깊은 증오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시대의 일본인들은 과거 일본의 만행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증오를 퍼붓는다면, 우리 두 나라의 관계는 결코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이 심리적인 원한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분개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치유되지 못한 해묵은 상처에서 생긴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자기 나라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더 고통 받고 위로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듣거나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일은 몹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기꺼이 이 고통을 수용하고 한국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공유할 때에야 진정한 화해와 보상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일본에도 정의로운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믿는다. 나는 자기 나라가 과거 아시아 여러 나라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유감과 고통을 느끼는 일본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우리와 미국 의회까지 동행한 요시다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학술적으로도 과거 일본인 생활사를 연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활동으로 유감과 사과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진지하게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다.
그는 위안부 여성들에 관한 사료를 수집하면서, 무조건 일본 정부가 사과하고 국제법과 관례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요시다 교수와의 만남 역시 내가 발견한 또 다른 희망의 빛이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한국 정부는 1967년에서 1972년까지 7년 동안 미군의 연합군으로 많은 군인들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약 5만 명의 한국 군인들이 다낭 지역에 주둔했다.
한국 국방부는 아직까지 어떤 공식 보고서도 내놓고 있지 않지만, 한 NGO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9천 명 가량의 베트남 시민이 한국 군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참전 용사들은 어떨 때는 민간인인지 베트콩인지 구분하기 힘들었고, 사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베트콩에 협조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NGO 단체가 한국 군대가 싸운 지역 부근을 조사하고 살아남은 피해자나 그들의 친척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몇몇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몇 사람은 한국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비인도적인 잔학성을 증언하기도 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학살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증오의 비’라는 이름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베트남 정부가 경제개방정책을 선택하고 남한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면서 기념비들은 현재 모두 철거되었다.
2015년 4월 초순, 한국의 한 NGO 단체가 한국-베트남 양국의 화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2분의 베트남전쟁 학살 생존자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한 사찰의 강당을 빌려 베트남 전쟁 사진전을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베트남전 참전 전우회가 이 전시가 허락되면 사찰을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사찰은 어쩔 수 없이 전시회를 취소해야 했다. 이 두 분의 증언을 듣는 컨퍼런스가 열린 곳에서도, 백여 명의 우익 활동가들이 몰려 와 자신들은 베트남에서 결코 시민들을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거짓 증언을 중단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컨퍼런스에 참여한 명진 스님은 베트남 증인 두 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진 스님 자신도 1년 정도 베트남에 주둔했으며,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일에 대해 늘 부끄럽고 미안했다며, 이제라도 베트남전쟁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두 증인 가운데 한 분이 명진 스님에게 다가 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나중에 이 베트남 여성은 여전히 잠을 잘 못 자고, 한국인들을 만나면 무섭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인들 가운데 좋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가슴에 평화를 담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도 나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글 서두에서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20장 부활 이야기에는 ‘무덤’이라는 어휘가 7번이나 나온다. ‘무덤’이라는 말은 예수의 부활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어휘는 아닌 듯하다. 내 생각에 복음사가가 부활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이 어휘를 의도적으로 반복한 게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무덤은 우리가 찾아가거나 머물고 싶어 하는 장소는 아니다. 오히려 피하거나 지나쳐 버리고 싶은 곳이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에서 요한은 예수의 현존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빈 무덤’과 ‘수의’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빈 무덤을 보고 믿었다.
복음사가가 빈 무덤과 ‘수의’ 만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은 사도들의 믿음을 나타내려 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런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 협력의 징표보다는 군비 경쟁, 외교적 파워 게임과 군사 전략을 드러내고 있다. 시체를 둘러쌌던 무덤과 유사한 형국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곳에서조차, 우리는 무덤 안에 놓인 수의처럼 희미하게나마 평화와 사람들 사이의 화해라는 희망의 증거를 만날 수 있다. 이 복음에 의해 우리는 암울한 현실에서도 빈 무덤과 수의와도 같이 희망을 추구하는 자리에 초대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