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등불을 켜서 숨겨두거나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둡니다. 그래야 방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34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당신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당신 눈이 병들었으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 35 그러니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잘 살펴보시오. 36 당신의 온몸이 어두운 데가 하나 없이 빛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마치 등불이 그 빛을 당신에게 비출 때와 같이 당신의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루카 11,33-36)
하느님 말씀을 듣는 행복한 사람들과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대조되고 있다.
33절과 비슷한 내용이 이미 있었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루카 8,16) 35절 살펴보다skopo 동사가 가정법이 아니라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만일의 경우에 살펴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살펴보라는 말이다. 초대교회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던 문장이다.
36절은 동어 반복 아닌가. 하나마나한 뻔한 말 아닌가. 내 몸이 밝으면 모든 사람에게도 내 몸이 밝게 보인다는 말인가. 그보다 estai라는 미래 시제가 중요하겠다. 현재 내 몸이 밝으면, 미래에도 내 몸이 밝을 수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선교에서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예고일까(마태오 5,14-16; 필립비 2,15). 마지막 날에 드높여진다는 말일까(필립비 3,21; 코린토후서 3,18). 둘 다 가리키는 듯하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하고 앞단락에서 예수는 탄식하였다. 오늘 예멘이라는 나라가 있는 지역인 사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의 사례를 설명한 예수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이제 말한다. 예수가 군중에게 하는 말이다. ‘등불, 빛, 비추다’라는 단어와 ‘어두움’이 대조되고, ‘집과 몸’이 비유되고 있다. 33절 등불은 루카 8,16, 마태오 5,15에 있다. 몸의 등불로서 눈은 마태오 6,22-23에 있다. 예수가 격언에 쓰던 단어와 문장이 논쟁에서도 보이고 있다. 예수의 마귀 추방에서(루카 11,20), 말씀에서(루카 11,28) 하느님나라는 백성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집에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기름에 불을 붙여 벽에 세우는 등불이 있었다. 등불이 어두우면 사람이 넘어질 수 있었다. 등불이 사람을 지켜주듯이 눈이 사람의 몸, 즉 사람을 지켜준다. 눈이 속한 몸을 밝은 눈이 밝혀주듯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병든 눈은 온몸을 어둡게 할 뿐더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시력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해야 하겠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않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34절에서 사람의 몸을 집에(루카 11,24) 비유하고 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는 격언이 그리스철학에서 온 것 같지는 않다. 공동성서에 눈과 빛을 연결하는 구절이 있었다. “눈은 등불 같았고…”(다니엘 10,6), “이 일곱 등잔은luxnoi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다”(즈가리야 4,10).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에서(34절), 몸의 등불이 주어이고 눈이 술어다. 거꾸로 이해하면 안된다. 주어와 술어의 위치에 따라 단어의 뜻과 폭이 조금 달라진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라는 문장과 ‘눈은 몸의 등불이다’는 문장의 뜻이 똑같지는 않다. ‘미인은 잠꾸러기’와 ‘잠꾸러기는 미인’은 같은 문장이 아니듯 말이다. 등불이 집을 밝혀주듯, 눈은 몸을 밝혀준다.
34절 “당신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당신 눈이 병들었으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몸이 이미 건강하니 비로소 눈이 건강하다. 2. 좋은 눈이 있으니 비로소 몸이 건강하다. 1번은 교의신학적 해석으로 2번은 윤리신학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Bovon, 3 212).
포도원 일꾼과 품삯 비유에서 11시간을 일한 사람은 ‘악한 눈’을 가졌다. 1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일당을 받아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마태오 20,15) 핀잔을 들어 마땅하다. “인색한 생각이 들어 가난한 형제를 냉대하여 꾸어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마음에 다짐하여라. 그가 너희를 걸어 야훼께 부르짖으면 너희에게 죄가 돌아올 것이다”(신명기 15,9) 기쁨의 해 희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의 눈은 악하다.
빛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 다른 배경에서도 언급되었다(마르코 4,21 비유; 마태오 5,15 산상수훈). 오늘 단락에서 등불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가. 예수는 빛이다. 예수에 의지하면 우리는 구원의 밝은 몸이 된다. 예수는 요나보다 더 크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크다.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게 루카가 크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신명기 15,4)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하고 싶은 단 한마디 말씀 아닐까. 하느님의 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의 눈은 악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 예수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의 눈은 악하다. 눈이 밝아야 인간이 밝다. 인간이 밝아야 세상이 밝다.
보다, 봄, 보는 것. 사물과 정신을 알고 깨닫기 위한 최초의 관문이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신앙인의 바람직한 행동은 보기, 판단, 행동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맨먼저 순서가 보는 것이다. 보기에서 인간은 시작된다. 보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잘못 보는 인간은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 보는 눈이 비뚤어지면 판단도 잘못되기 쉽다. 보는 눈이 악하면 행동도 악하게 된다.
TV 카메라맨이 언론을 좌우하고 세상을 좌우한다. 화면에 비치는 모습을 사람들은 사실로 진실로 받아들이기 쉬우니 말이다. 카메라맨을 지배하는 사람이 권력자이고, 언론을 지배하는 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언론 자유는 선거제도보다 민주주의에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지금 한국은 내용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비판적인 종교 언론이 없는 종교는 부패하기 쉽다. 가난하지 않은 종교, 비판언론이 없는 종교는 무너지기 쉽다. 한국 가톨릭교회에 언론은 있는가. 비판 없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어용 언론은 백성을 해치고 민주주의를 망치고 종교에게 아편 노릇을 한다.
우정사업본부는 현대 한국 인물 시리즈 네 번째 우표를 최근 발행했다. 성철 스님을 기리는 우표에 스님의 문구 不欺自心(불기자심,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 새겨져 있다. 김수환 추기경을 기념하는 우표에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추기경의 문구가 친필로 새겨졌다. ‘몸의 등불은 눈’을(34) 조금 바꾼 말이다. 오늘 단락의 메시지를 잘 표현한 문구다. 성철 스님이 그립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립다.
김수환 추기경이 떠난 후 추기경이란 단어조차 한국에서 빛을 잃었다. 추기경은 모두 김수환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줄로 우리는 알아왔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는 말이다. 지금 추기경 두 사람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존재 의미가 있는지, 추기경인지 아닌지,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심정을 가볍게 묵살해서도 안된다. 험악한 세상에서 자유와 해방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기적을 요구하는 데 머물지 말고 좀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것을 하는 사람들이 곧 선교사요 교회요 하느님 백성이다. 세상의 악을 정직하게 보며 하느님나라의 기쁨을 전하는 것이다. 현실에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인간과 세상을 어두움으로 몰아넣고 만다.
눈이 속한 몸을 밝은 눈이 밝혀주듯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 병든 눈은 온몸을 어둡게 할 뿐더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시력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해야 하겠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않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먼저 우리 자신이 눈을 떠야 한다. 교회도 제대로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사람사는 세상을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