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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4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01-27 1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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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스바 2,3; 3,12-13)

<너희 가운데 오직 주님께만 의탁하는 가난한 백성만 살아남게 하리라>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제2독서(1코린 1,26-31)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어리숙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마태 5,1-12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연중 제4주일 독서·복음 묵상


제1독서(스바 2,3; 3,12-13) 해설

<너희 가운데 오직 주님께만 의탁하는 가난한 백성만 살아남게 하리라>


스바니아서는 이사야서가 쓰여진 지 1세기쯤 뒤에(주전 640년) 쓰여졌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망한 뒤(주전 733년),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신중하고도 세심한 정책을 펴서 국력과 국권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더불어 무너져가는 과정을 붙잡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아시리아의 속국이 된 처지에서 이도교의 신들을 섬기고 제사를 바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성전 안에서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다(스바 1,4). 국권이 약해지자 그들은 주님의 법률 준수를 포기하고서 폭력과 불의를 일삼게 되었다(스바 3,1-17).


이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스바니아는 ‘주님의 날’을 선언한다. 주님의 날을 어렴풋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적극적인 면을 구체화한다. 소수의 ‘남은 사람들’, 주님께 충성을 바친 나머지 가진 것 없게 된 가난한 사람들이 멸망을 피하여 농사와 노역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 스바 3,11-13의 신탁은 2,3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내용이다. 이 신탁은 구약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겸손한 백성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올바르게 살기로 노력하고, 그 노력 때문에 수탈당하고 가난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편 (145) 해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히브리인들이 아침 전례에서 찬미가로 사용하던 시편이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가난한 사람의 기쁨을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로 불러 바쳤듯이,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라면 구원받은 기쁨의 찬미가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가족 전체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서 소유를 포기하여 서로 나눔으로써 참으로 부유해질 수 있다는 철저한 가난의 정신을 발휘할 때, 인류공동체는 기쁨의 찬미가를 하느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화해와 단합을 위해 몸 바치는 겸손한 종으로 오고 인류와 더불어 나그네 길을 함께 하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1코린 1,26-31) 해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어리숙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바오로는 25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설파하면서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그 말씀을 적용시킨다. 그들이 믿으라는 부르심을 받을 당시 그들은 부자도 귀족계급도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천대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노예,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부르신다. 이것은 바오로의 기본 주장에 속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어지심에서 비롯된 선물이지 사람 자신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랑하거나 교만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 자세가 철저한 가난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원, 재화, 소질, 능력, 믿음은 자랑하고 교만해지라는 자기 소유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발휘하고 바쳐야 하는 귀중한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자랑하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은 사사로운 욕망에 사로잡혀 불의를 저지르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 것으로 알아 승복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욕심이 없고 자랑할 마음도 없는 천대받는 못나 보이는 사람들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고 불쌍히 여겨 받아주신다.


복음(마태 5,1-12ㄴ) 해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참된 행복’에 관한 이 말씀을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지침과 대헌장으로 여겼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이 대목을 노래한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모세처럼 ‘산위에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다.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정의’의 전언을 설파한다.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사용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 것이 없고 내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아무 것도 없음을 승복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가난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인 겸손은, 자랑하고 자기의 이름을 인정받으려는 헛된 교만과는 반대 개념이다.


이 같은 겸손한 마음 자세를 지켜야만, 예수님께서 “억눌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어진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신 것처럼, 스스로를 비우고 소유를 제한하거나 포기한 교회(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실제로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수의 불의와 교만 때문에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인권을 짓밟히는 인류 대부분을 풀어주는 유일한 길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깡그리 비우고 가난한 인류 대부분의 삶에 동참한 다음, 불의와 압제의 사슬을 끊어 소수의 불의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정의와 화해와 용서와 나눔의 사랑을 구현하여 인류가 하느님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를 이룩하도록 온 힘을 기울이는 길 밖에 없다.


묵상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 능력을 뽐내고 자랑하는 자들, 그 능력으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수탈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공허함과 아귀다툼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두기도 하신다. 그것은 그들을 깨우쳐 돌아서게 하려는 채찍질이다. 재물을 쌓고 권세를 쥐는 것이 하느님의 복이 아니다. 그런 상태는 부당하고 불의하고 하느님의 벌을 자초하는 상태이다. 재물과 권세에 의탁함은 허깨비 짓이다.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이렇게 겸허한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라야 인류의 하나 됨에 기여할 수 있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백성


스바니아 예언자가 살던 어지러운 시대, 정치적으로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떨어져 도덕적ㆍ종교적 가치들이 무너지던 시대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 스바니아 예언자가 나타나서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외세에 의지하여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강력한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열리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정의를 사회 안에 구현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주님이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열린다고 역설한다. 하느님의 초대는 정의를 찾아 나서기 위해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들라는 초대이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만족하고 안정을 구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지 않고, 불안하고 고뇌하고 행동으로 찾아나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 이러한 태도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태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사람’을 택하고 사랑하신다. ‘가난한 사람’이 발휘하는 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다. 


성경의 ‘가난한 사람’은 흔히 불의한 사람들에게 탄압과 수탈과 경멸을 받기 일쑤다. 그리하여 빈곤과 기아를 견디는 것이 상례다. 그 수난은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에서 당하시는 수난이요, 불의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한 수난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인류 대부분은 실상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네 수난으로 소수의 불의한 계층을 기필코 돌아서게 하고야 말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미래는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선한 사람들, 정의를 추구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 인류의 화해와 단합인 평화를 위해 나눔의 사업을 펴는 사람들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는 빈곤과 속박의 상태는 어디까지나 악이고 악마의 소행에서 나온 것이다. 빈곤과 속박 상태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풍요 자체가 목적일 수도 없다. 


능력과 물질을 골고루 넉넉하게 나누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치와 사랑의 기쁨이 행복이다. 그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과 풍요를 누리게 될 마지막 행복이다. 능력과 물질은 그 기쁨을 얻어내는 수단으로서만 귀중한 가치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늘 깨어 있어 불의한 길에서 돌아서기로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올바른 정의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수난자로서 사회와 인류를 화해와 사랑의 공동체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수탈과 인권침해를 당하는 힘없고 천대받는 인류 대부분을 선택하신다. 그들 안에서 그들이 무능하고 가진 것 없는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힘차게 발휘되어 불의한 압제자들을 벌주고 돌아서게 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는 능력과 재산을 뽐내는 유능하다는 불의한 수탈자들이 아니라, 한없이 바보처럼만 보이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강력한 입김이신 성령께서 그런 사람들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신다. 그런 사람들 자신을 깨우치고 그들 스스로 일어나게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을 해방을 받는 것은 권력과 재물에 영합하고 결탁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구체적 역사 상황 안에다 실현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굳어진 잔인한 마음을 하느님의 강력한 팔의 힘,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깨어나 인권을 되찾는 노력의 힘으로 녹여내어, 나누고 섬기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꾸어놓기 위해 몸 바치는 것이 모두 구원받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거듭 회개하고 화해하고 일치하여 하느님께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변할 때, 빈곤과 인간차별이 사라지고 모두 넉넉한 가운데 일치와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기쁨에 찬 인류가족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주 새롭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나라로 건너갈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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