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죽어도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 사람들 모두 떠나가도 나만은 홀로 당신만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가 하룻밤 사이에 돌변해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반을 하고 기어이 돌아서 버렸을 때, 그리고 다시 돌아와 완전히 맥빠진 채 당신 곁에 감히 다가서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눈에 베드로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 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의 배신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신 예수님이시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한결 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의 배반을 분명히 기억하셨던 주님께서는 세 번씩 사랑에 대해 물으신다. 그럼으로써, 대답하는 자도, 대답을 듣는 자도 똑같이 감당해야 했던 배신의 그 깊은 그늘을 스승께서는 한 꺼풀씩 벗겨 주시고, 마침내 어두움 속에 있던 제자를 빛으로 이끌어 내신다.
사랑하다가 배신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별을 하게 되면, 다시 사랑하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가 버렸는데, 다시금 그 몸과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다시는 꼴도 보지 않겠다고 모질고 독하게 돌아서 놓고서도, 세월이란 놈은 참 무섭다. 원망과 저주를 퍼부을 만큼 퍼붓고 나면, 사랑하고 또 미워했던 만큼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그 사람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진다.
그가 나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들도 생각나고, 내가 그 사람을 다 채워주지 못했던 모자람도, 마치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해변에 떠밀려온 부유물처럼, 나의 부족함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렇지, 그 인간이 그러면 안되지...’ 하면서도, ‘그래, 어쩌겠나 ? 이게 다 사람 사는 거다...’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던 마음도 아주 천천히 열리게 된다.
미움과 저주, 원망과 분노로는 지금의 이 상황의 어느 것 하나도 바꾸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 모질고 독한 세상을 살며 상처 하나 안 남기고 사는 가슴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산다. 아프지만 또 믿고, 고통스럽지만 또 사랑하고, 억울하지만 또 안아주며, 결국 또 그러고서 산다.
그런데, 그렇게 지난(至難)한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 널브러져 있는 참으로 많은 슬픔과 고통과 눈물, 자기 몸뚱아리 안에도 새겨져 있는 그 많은 슬픔과 고통과 눈물을 외면하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마치 그런 것들로 한 가득한 것이 원래 인생이려니 하면서 말이다. 그 슬픔과 그 고통과 그 눈물을 만들어 내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심지어 그런 악으로부터 콩고물이라도, 팥고물이라도 얻어 먹을 요량으로 자발적으로 착 달라 붙으려 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입으로는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죄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나 없애시고, 저희에게는 자비나 베풀어 달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게 원래 슬프고, 고통스럽고, 눈물 바다인 것이 아니다. 인생을 그렇게 슬프고, 고통스럽고, 눈물 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 그런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확답을 들으려고 했던 사랑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과 함께 세상의 죄를 없애는 데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그저 보듬어 주고, 안아 주고,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한 전제 조건인 정의와 반드시 함께 간다.
사랑과 정의는 정비례 관계다. 사랑이 커지면, 정의도 커지고, 사랑이 줄어 들면, 정의도 줄어든다. 더불어, 사랑과 정의는 그 대상이 분명 다르게 적용된다. 세상의 눈물과 한숨과 절규에 ‘나 몰라라’하고, 그런 것들은 루저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조롱하는 죄 많은 부자들, 힘 센 사람들, 그들에게는 정의의 심판이 주어져야 한다.
힘 없는 사람,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가혹한 정의를,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사랑을 펼쳐내려는 이 작태가 참으로 원망스럽기까지 한 현실이다.
빵 하나 훔친 장 발 장(jean val jean)에게는 19년의 감옥살이가,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을 해쳐 먹은 자들에게는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들먹이며 특별사면이 준비되어 있는 현실이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미움과 저주, 원망과 분노의 시간, 분명히 필요하다. 그런 시간이 있어야만, ‘너는 나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나는 너에게 그러지 않겠다. 그러나 너의 모짐은 분명 잘못된 것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모질었던 너의 지난날을 그저 덮어 두고, 그저 잊어버리는 것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나고, 그 자각이 바로 정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간다. 사랑과 정의는 정비례다 »는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숱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욕짓거리와 손가락질을 온몸으로 받아 가면서도 진상 규명을 항구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지난 해 4월 16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멈칫거리고, 주저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교회, 참으로 베드로를 많이 닮은 교회에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 교회여, 당신들은 나를 사랑합니까 ? », « 교회여, 당신들은 나를 사랑합니까 ? », « 교회여, 당신들은 나를 사랑합니까 ? ».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렇다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들을 돌보시오.» « 내 양들을 돌보시오 », « 내 양들을 돌보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