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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대주교가 교회에 주는 교훈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5-23 1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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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성직자

1977년 2월 23일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 대교구 교구장이 된 로메로는 정부와 부유층 신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 환영은 3주를 넘기지 못했다. 3월 12일 예수회 그란데신부가 군인들의 총에 살해되었다. 로메로의 친구인 그는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일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사건이 로메로를 하루 아침에 회개시켰다.


60세의 로메로는 회개한 뒤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후 3년 그는 불꽃같은 생을 살았다. 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꼭 닮았다. 그들 모두 인생 말년을 짧고 멋지게 살다 떠났다. 로메로는 가난이라는 현실을 알아갔다.


진정한 회개는 부자 편에서 가난한 사람 편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않은 사람은 회개했다고 말할 수 없다. 회개의 가장 뚜렷한 모습은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 태도다.


박해받는 주교

5월 23일 로메로 대주교는 복자로 선언된다. 그의 죽음이 '신앙에 대한 미움'(odium fidei)에서 생긴 죽음이냐를 둘러싸고 오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odium fidei로 인한 죽음만이 가톨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순교의 죽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폭력적 죽임을 당해도 그들을 순교자로 부를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칼 라너는 순교에 대한 폭넓은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로메로 대주교가 예를 들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 깊은 그리스도교적 확신에서 투쟁에 참여했다 해서 그를 순교자라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정의를 위한 투쟁에 앞장선 로메로의 죽음은 그와 비슷한 이유로 죽임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적 가치를 되찾아주었다. 예수만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 아니다. 예수 이전과 이후 무수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로메로 대주교만 군인의 총에 살해된 것이 아니다. 로메로 이전과 이후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해되었다. 정의를 위한 투쟁에 앞장선 로메로의 죽음은 그와 비슷한 이유로 죽임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적 가치를 되찾아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 성직자

엘살바도르 정부가 로메로에게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목자는 자기 양떼가 안전하지 못할 때, 자신의 안전을 원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 답에 엘살바도르 가난한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로메로가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계속 세상의 해방을 위해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로메로 대주교의 말을 자기 백성과 연대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이런 목자와 함께라면 착한 ddiEP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라고 로메로는 말했다.


로메로는 살해되기 전 24개월 동안 일기를 거의 매일 녹음 테이프에 남겼다. 살해되기 전 해외로 도피하라는 권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예수처럼 죽음으로 가는 길을 그는 꿋꿋이 걸었다. 그는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다. 불의한 세력과 싸움에서 얻는 고통은 체념보다는 해방을 가져온다.


로메로에게 무엇을 배울까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일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밝힌 교회의 임무다. 로메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복음의 빛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복음의 빛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제1 임무는 아니다. 불의한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나라로 바꾸려 애쓰는 것이 핵심 임무다.


회개는 가난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야 한다. 이 주제에서 로메로는 한국교회에게 적절한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정의를 위한 투쟁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크게 가치있다. 하느님나라 선포는 하느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과 대결을 불러온다.


그 대결을 피하지 않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나라 선포는 반드시 십자가를 부른다. 정의를 위한 투쟁 없이도 신앙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로메로의 삶은 충격이다.


“부자와 권력자에게 도움받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아니다”라는 로메로대주교의 말씀은 한국 주교, 사제, 신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만들라”는 프란치스코교황의 경고와 같은 맥락이다. 교황과 로메로의 말씀을 외면하느냐 받아들이느냐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로메로의 행동을 자주 방해하던 4명의 엘살바도르 주교들은 로메로 장례미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가난한 백성들과 신자들이 주교들의 대성당 입장을 막았기 때문이다. 대성당 벽에 걸린 현수막에 4명 주교들의 이름과 입장금지라는 단어가 써 있었다. 주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심판받는다.


부자와 가까이 지내는 성직자는 결국 몰락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성직자는 회개의 은총을 누린다. 로메로대주교가 그랬다. “이런 양떼들과 함께라면 착한 목자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라고 로메로는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목자와 함께라면 착한 양떼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라고 기쁘게 답하였다. 우리도 제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지금 한국에 이런 주교 어디 있는가.


“종교는 백성을 상대하는 것이지 정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로메로의 말을 한국교회에 들려주고 싶다. 한국천주교회는 어떻게 하면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사이좋게 지낼까 궁리하는 모습이다.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로메로대주교나 프란치스코교황이 걷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주교는 순교하는 사람이지 경영자가 아니다. 사제는 십자가를 져야지 골프채를 쥐면 안 된다. 로메로 앞에서 한국 성직자들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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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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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gnatios2015-05-26 11:00:36

    "착한 목자는 가난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어서 권력이나 돈에만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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