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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2 : 어리석은 부자 비판
  • 김근수
  • 등록 2017-03-14 10:23:54
  • 수정 2017-03-14 11: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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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자 14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여러분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입니까?” 하고 대답하셨다.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시고는 16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17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18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습니다. 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21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루카 12,13-21)



박근혜 비리를 수사한 박영수 특검이 낳은 명언이 오늘 본문을 보는 내 가슴을 먼저 울리고 있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가 우선이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다. “교회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난은 경제학의 범주가 아니라 신학의 범주”(복음의 기쁨 198) 라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벅찬 감동과 아주 비슷했다.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다. Bovon은 루카가 지어낸 이야기로 보지는 않는다. 오래 전해진 전승에 루카 고유의 전승을 덧붙여 편집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Bovon, III/2 274). 루카가 어디서 참조했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13-14절은 도마복음 72에 보이고 16-20은 도마복음 63,1-3에 보이긴 한다.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인문학 강좌에 등장할 만한 이야기다. 문학 형식으로 비유에 속하지만 내용적으로 부자를 강하게 비판하는 가르침이다. 


바로 앞 루카 12,1-12에서 예수는 군중 속에 있던 제자들을 가르치던 참이었다.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 예수의 말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형제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왜 예수에게 느닷없이 유산 문제를 물었을까? 예수를 스승으로 본 것이다(신명기 21,17; 민수기 27,8-11). “누가 나를 여러분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입니까?”라는 예수의 반문은 탈출기 2,14에서 모세의 반문을 택한 것이다. 예수는 즉답을 피했다. 두 가지를 뜻하는 것 같다. 예수는 하느님나라 선포라는 자신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싶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일상적인 법률 다툼에 휘말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왜 이 이야기를 보존했을까? 


14절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meristes는 당시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15절에서 예수는 동생과 유산을 나누지 않으려는 형에게 탐욕이라는 단어로 비판하고 있다. 탐욕은 우상숭배, 방탕과 함께 이방인들이 범하는 3대 죄에 속하는 것으로 유다인들은 여겼다(Kremer, 136). 풍부한 재산이 생명을 보장한다는 당시 통념을 예수는 비판했다(루카 9,25; 16,13-26). 돈에 대한 욕심을 신약성서는 여러 곳에서 비판하고 있다(로마 1, 29; 코린토전서 5,10; 에페소 4,19; 콜로사이 3,5). 16-20절은 오늘로 말하면 재벌쯤 되는 대토지 소유자의 삶을 언급하고 있다. 재산으로 생명을 보장받으려는 태도는 하느님의 눈에 어리석게만 보인다(시편 39,7).


16절 이하 예수의 비유는 13절 유산 다툼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보기는 사실 곤란하다. 비유에 등장한 부자는 유산을 독차지해서 재산을 모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부자가 불의하게 재산을 모았다는 지적도 없다. 예수는 유산 다툼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뛰어 넘어 돈 일반에 대한 경고로 건너가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돈을 모으든, 돈에 대한 기대를 예수는 겨냥하고 있다. 17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은 루카 16,3의 현명한 재산 관리인과 20,13의 포도밭 주인 이야기에도 나온다. 18절에서 부자는 밭에서 난 곡식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보관하려 했다. 당시 왜 스위스 은행이 없었단 말이냐.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읽을까. 


21절은 16절 이하 비유에서 방향을 크게 틀었다. 재산의 덧없음에서 참된 재산과 가짜 재산으로 주제가 확 바뀐 것이다(디모테오전서 6,18; 히브리서 11,26; 야고보 2,5; 요한묵시록 3,15-18). 재산의 덧없음을 깨달은 사람은 참된 재산과 가짜 돈을 구분하게 된다는 예수의 깊은 뜻 때문일까? 재산의 덧없음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부자들이 많다. 그런데, 21절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을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라고 신자들을 윽박지르는 용도로 잘못 쓰여 왔다. 그렇게 성서를 인용하면 성서에 인색한 사람이 되고 만다. 


공동번역 신약성서는 오늘 단락의 제목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했다. 독일의 개신교신학자 Wolter는 ‘재산의 덧없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Wolter, 446). 둘 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부자 비판’이라고 이름 붙였다. 소유욕이라는 추상 개념을 다룬 것이 아니라 부자라는 부류의 인간을 비판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자와 예수 두 출연자가 TV에서 유산 다툼을 주제로 생방송 토론을 벌였다고 상상해보자. 예수는 토론에서 일방적으로 여러 번 논점을 바꾸었다. 예수는 토론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 토론을 보고서 어느 신문기자가 오늘 단락처럼 보도했다고 치자. 부자는 예수의 발언에 아무런 반박도 응답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그 토론은 어떻게 평가될까. 그 보도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런 곳이 복음서에 한두 군데가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와 토론한 상대방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있다. 일방적으로 예수의 발언만 크게 보도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처럼 우리가 토론 내용을 보도하면 안 된다. 복음서를 읽을 때 그런 점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덤으로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대화와 토론에서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대가 쓰는 단어의 뜻, 내포와 외연을 그래도 상대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 쉬운가? 예수도 가끔 토론 원칙을 어기고 그러는 데 말이다. 복음서 저자들도 보도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는 데 말이다. 대화와 토론은 그토록 중요하고도 어렵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  Habermas가 아무리 이상적인 대화 조건을 제안했다고 해도 그렇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오늘 본문은 흔히 부자 신자를 훈계하는 데 사용되어 왔지만, 부자 교회를 향한 예수의 경고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주교들과 만남 연설을 보자. “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에는 유혹이 잇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사교 모음‘에 그치고 마는 위험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왜 한국 주교단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덕담으로 가득 채워도 모자랄 귀한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주교들을 사정없이 혼낸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사교 모임에, 중산층 교회에,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에, 잘 나가는 이들을 위한 교회라는 위험에 지금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야고보 사도처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를 꾸짖었다(야고보 2,1-7). 가난한 사람들을 잊으면 복음을 잊는 것이다. 


재산으로 생명을 보장받으려는 태도는 하느님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지만 사람의 눈에 현명하게 보인다. 각종 보험과 연금에 노후보장은 물론 사후 보장까지 노리는 것이 오늘 부자들과 우리들 심정 아니던가. 부자들은 돈으로 피를 바꾸고, 세포를 바꾸고, 또 무엇이든 바꾸어 수명을 연장하고 불멸까지 노리고 싶은가. 돈은 귀신도 춤추게 하고, 심지어 하느님도 춤추게 한다고 떠들어대지 않던가. 부자의 돈 욕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돈과 죽음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돈과 하느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세상의 부자들아, 잘 들어라. 


하느님은 부자를 비웃지만, 부자는 하느님을 비웃곤 한다. “너희들은 솔직히 돈만 바라잖아?” 하며 부자들은 그리스도교와 성직자들을 비웃곤 한다. 부자들은 살아서 종교와 종교인에게 후한 대접을 받고 죽어서도 종교의 혜택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부자를 소홀히 대접하는 종교가 역사에 있던가. 부자를 우대하지 않는 종교인을 구경이나 할 수 있던가. 종교는 부자와 하느님 중 누구를 편들어 왔던가. 어떻게든 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애쓰는 사람들이 이른바 직업 종교인 아니던가. 예수처럼 부자를 강하게 비판하는 종교인을 내 평생 일곱 사람이라도 구경해보고 싶다. 


예수를 진짜로 따르느냐 여부는 놀랍게도 돈에 대한 태도에서 결판나는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구원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좌우된다. 최후 심판의 비유(마태오 25,31-46), 부자 청년의 질문(마르코10,17-27)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머지 문제는 다음다음 문제다. 인간 구원은 종교적 신념과 교리에 대한 충실함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입을 벌려 아무리 크게 자주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구원에 결정적인 관건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 구원은 없다(Extra pauperes nulla salus). 신학에서 가난의 신비는 자주 다루어졌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신비는 소홀히 취급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들어보자.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주로 고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것이 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중요한 진리를 밝혀주는 참으로 놀랍고 기쁜 말씀이다. 1.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부자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계신 자리다(locus Dei). 하느님을 만나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된다. 2.  가난한 사람들은 신앙의 스승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앙을 배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오늘 이야기를 보존해온 이유를 이제 조금 짐작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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