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촛불을 통해 거리로 나서면서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을 심판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정계, 학계 등에서 입장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천주교회도 입장을 밝혔다.
먼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직후 입장을 밝혔다.
김희중 대주교는 헌재의 선고에 대해 “국민이 선출해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와 헌법 수호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입증한 것”이라 평가하며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굳건히 뿌리내려야 할 과제가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선고를 아프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탄핵 인용 결정 전날에도 담화문을 통해 국민화합과 헌재 판결 수용을 호소했던 주교회의의 입장이 그대로 이어지면서 김 대주교의 입장문은 천주교회를 대변하는 입장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온 국민이 일궈낸 촛불민심 두고, “화합해라”…
염수정 추기경도 이날 서울대교구장 이름으로 입장문을 발표했다.
염 추기경은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란 성경구절을 인용해 “이제는 탄핵을 지지했든 반대했든, 정치권과 국민들이 헌재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국민 통합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정치권을 향해서는 “국민에게 끼친 걱정을 송구하게 생각하고 국민 앞에 진정으로 사죄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고, 국민을 향해서는 “이제는 화합의 길에 동참하고, 일상에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별도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자며 “희생과 봉사로 이 땅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고 우리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사회의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민의 화합과 일치를 돕고 참다운 민주 발전을 북돋워, 진정으로 공동선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헌재 판결 이후 즉각 발표된 염 추기경의 입장문은 일부 신자들과 성직자들로부터 논란이 됐다. 촛불민심이 탄핵정국을 만들어 낼 동안 종교계 지도자로서 청와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과 면담을 한 것 말고는 일체 침묵했던 염 추기경이 적폐청산 정국에 이르러 담화문을 발표한 것이 뜬금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온 국민이 힘을 모아 한겨울 아스팔트 바닥에서 일궈낸 촛불민심을 두고 “이제는 화합에 동참하라”는 말이 도대체 누구와 화합을 하라는 것이며, 안락한 휴일을 포기하고 국가의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주권의 의무를 다하려고 거리에 나섰던 국민에게 “일상에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라”는 말은 도대체 국민이 어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보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현시점의 사회 통합, 아무렇게나 섞거나 적당히 흉내 내서는 안 돼”
천주교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 경향신문 >과의 인터뷰에서 섣부른 사회통합에 대해 경고했다. 사회 통합과 갈등 봉합이 중요하지만, 현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은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섞어 적당히 흉내를 내는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통합은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섞어찌개를 만들거나 비빔밥으로 적당히 흉내를 내는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국민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인지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 여망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강우일 주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지도층이 형성돼야 의미 있는 통합이 완성된다”고 짚었다.
촛불민심이 탄핵을 이뤄낸 결과에 대해서도 “8인의 헌법재판관 전원이 탄핵 인용으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것은 그만큼 온 국민이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헌재의 판결을 겸허하고 차분하게 수용하라고 했던 염 추기경의 말과는 분명히 그 뜻이 달랐다.
특히 “무엇보다 이렇게 대통령이 퇴진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군사독재의 흐름과 거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사고와 가치관, 그 세력들이 지금껏 이어져 왔는데, 이번 일을 통해 막을 내리게 됐다”며 한국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라고 설명했다.
강우일 주교의 인터뷰 기사는 앞서 발표된 입장문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이들에게 단비 같은 역할을 했다. 특히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박근혜 정권 타도와 적폐청산을 염원하던 국민의 마음을 가장 잘 공감하고 이해했다는 분석이다. 교회가 세상과 함께 걸어가면서 아픔을 나눈다는 의미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우리 수도자들이 먼저 회심하겠다”
세월호참사와 사드,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수도자들도 입장을 밝혔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참여해온 여성수도자들이지만, 입장문에는 국민을 향한 명령과 요구보다 자기반성과 성찰의 내용이 담겼다.
국민 모두가 진실과 정의를 향해 걸어온 긴 여행을 끝냈다는 기쁨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을 수 없다. 여성 수도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변화된 삶을 꿈꾸게 된다. (…) 사회의 정의와 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저마다 촛불을 밝혀 들고 모여든 자리에서 체험했던 따뜻하고도 놀라운 연대감을 꼭 기억하고 싶다
여성 수도자들은 “참된 평화와 정의가 시작되는 날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연대하며 일치를 이루어 함께 걸어가야 한다”라며 “이제 기도와 눈물과 탄식으로 틔워 낸 민주주의의 싹이 꺾이지 않도록 더 이상 우리 안에 분열과 미움과 다툼의 자리를 허락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작은 시작을 위해 우리 수도자들이 먼저 회심하겠다. (…) 세상의 정의가 또다시 흔들리지 않도록 항상 깨어 지키겠다. 무관심과 분리의 벽 저편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과 함께 하겠다
여성 수도자들의 입장문은 그동안 촛불민심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기도했을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탄핵정국을 자신과 별개로 보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신앙인 자신의 적폐와 마주할 수 있는 시선을 신자들에게 보였다는 점에서 실천하는 종교인의 모습이라는 평가다.
정치계와 학계 등에서는 촛불민심의 정권심판이 단순히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한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분석한다. 오랜 시간 한국 사회에 쌓인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도덕한 정권을 향해 날선 목소리를 냈던 한국 천주교가 다가올 적폐청산 정국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지, 그리고 스스로의 적폐를 얼마나 성찰하고 쇄신해 나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