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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3 :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시오
  • 김근수
  • 등록 2017-03-21 10:44:53
  • 수정 2017-03-21 10: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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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잘 들으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시오. 23 목숨이 음식보다 더 귀하고 몸이 옷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24 저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시오. 그것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곳간도 창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주십니다. 여러분은 저 날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습니까? 25 도대체 여러분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습니까? 26 이렇게 하찮은 일에도 힘이 미치지 못하면서 왜 다른 일들까지 걱정합니까? 27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시오.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습니다. 28 여러분은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습니까?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여러분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주시겠습니까? 29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마시오. 30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31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32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시오. 여러분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여러분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33 “여러분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시오.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습니다. 34 여러분의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습니다” (루카 12,22-34)



재산에 대한 탐욕과 자기 보존에의 초조함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하느님나라 열망과 대조되어 있다. 앞에서 부자를 비판한 뒤 이제 예수는 직접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는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연설하는 셈이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 (22-28)은 ‘걱정하지 마시오’me merimnate(22)로 대표된다. 예수는 두 가지 예를 즐겨 들곤 했다(루카 4,25-27; 11,31-32; 14,28-32).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부분(29-32)은 ‘염려하며 애쓰지 마시오’(30)가 대표다. 셋째 부분(33-34)은 재산에 대한 지혜로운 처신을 권고하고 있다. 22-31은 마태오 6,25-34와, 33-34는 마태오 6,20-21과 많이 비슷하다. 루카는 마태오처럼 ‘예수 어록’(Q문헌)을 참조하고 있다. 


앞 단락에 나온 곡식 창고를 지은 부자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 23절 목숨과 몸은 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가 여기서 인간을 그리스철학처럼 몸과 마음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아니다(Bovon, III/2, 303). 음식과 옷보다 목숨이 당연히 더 중요하다. 예수가 음식과 옷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음식과 옷 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예수는 음식과 옷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음식, 옷, 집은 고대에서도 인간의 삶에 필수 3요소였다(창세기 28,20; 디모테오전서 6,8). 예수가 왜 집 이야기(루카 9,58)을 빠트렸는지 이유를 우리가 알긴 어렵다. 예수가 혹시 무주택자라서 그랬을까? 자발적으로 집을 떠난 예수를 무주택자라고 볼 수 있다. 


24절에서 예수는 음식과 옷에 대한 비유를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에서 하나씩 가져왔다. 까마귀(욥 38,41; 시편 147,9)는 마태오복음에서와 다르게 루카에서 정결하지 못한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동물 중에서도 까마귀는 고향도 없고, 돌보는 목자도 없고, 불쌍한 생명체의 사례로 인용된 것 같다.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날짐승도 하느님이 돌보아 주신다. 제자들 처지가 까마귀 신세와 비슷하다는 해석은 조금 지나친 것 같다. 


25절 ‘한 시간’은helikia 키 또는 나이 또는 수명을 가리킬 수 있다. 성서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걱정한다고 자기 키를 더 크게 늘일 수도 없고 나이나 수명도 연장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작은 일에도 무능한 인간이 왜 더 큰 일을 걱정하느냐는 말이다. 날짐승과 들꽃이라는 작은 사례에서 출발하여 큰 일로 향하는 논리 전개 방식을 루카복음 저자는 쓰고 있다. 27절 솔로몬(열왕기상 10,1-13; 역대기상 29,25)은 부귀영화를 누린 대명사처럼 인용되고 있다. 우리 한국인은 솔로몬보다 박근혜의 옷을 떠올리는 게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28절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이라니? 나무가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은 빵 굽는 화덕에 불을 지필 때 마른 들꽃을 땔감으로 사용했다(Bovon, III/2, 307). 마른 들꽃은 금세 타 버린다. 허망한 신세다.  


28에서 예수는 “여러분은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습니까?”라고 묻는다. 제자들을 ‘믿음이 적은 사람들’oligopistoi 이라고 혼내는 것이다(마태오 6,30; 8,26; 16,8). 30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하느님이 사람과 짐승과 들꽃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ethne(마태오 6,7; 테살로니카전서 4,5; 에페소 4,17)과 다르게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배려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30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마시오”라니? 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남미 유학 시절에 뼈저리게 느꼈다. 루카는 세상살이 걱정을 업신여기는 게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우선 강조하는 것이다.


31절에서 예수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시오’라고 요구한다. 마태오 6,33에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고 했었다. 루카에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라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33절 “여러분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여러분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부분은 마태오에는 없다.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창세기 15,1; 이사야 41,10; 예레미야 46,27).


32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내 어린 양떼들’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 전문가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양떼라고(이사야 40,11; 예레미야 13,17) 부르듯이, 예수는 제자들을 양떼라고 불렀다. 양떼는 목자를 목숨 걸고 따른다. 양떼는 목자를 그처럼 믿는 것이다. 목숨 걸고 따른다. 예수가 첫 제자 시몬과 안드레아에게 한 첫 말씀은 ‘나를 따르시오’였다(마르코 1,17). 세리 레위를 만나서도 첫마디는 ‘나를 따르시오’였다(마르코 2,14). 하느님과 예수 자신에 대한 예수의 말은 복음서에서 둘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으시오”(마르코 11,22), “나를 따르시오”(마르코 1,17) 예수는 우리가 목숨 걸고 따를 만큼 믿을 수 있는 분이다. 목숨 걸고 따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그런 예수를 따르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행복하다.


33 “여러분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라는 구절은 왜 나왔을까? 루카복음 저자가 속해있던 공동체에는 부자들이 상당수 있었다(Bovon, III/2, 312). 부자 신자들과 가난한 신자들이 함께 있던 루카공동체에서, 루카는 부자들에게 권고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바오로도 그렇게 부자들에게 요구했다(로마서 15,25; 코린토전서 7,30; 코린토후서 8,4). 오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제들은 루카처럼 부자 신자들에게 그렇게 똑같이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있는가. 교회도 교회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가. 재산을 나누지 않으면 개인도 교회도 회개하기 어렵다. 재산을 나누지 않고 생각과 마음만 바꾸는 것은 예수가 말한 회개가 아니다. 


사제를 목자로, 신자들을 양떼로 비유하는 설교를 우리는 자주 들어왔다. 그 의미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목자인 사제들도 양떼에 속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양떼라는 단어를 듣기만 하면 내게 저절로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1979년 11월 18일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한 말이다. “이런 백성들과 함께라면, 착한 목자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 나라에도 로메로 대주교 같은 주교가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런 주교와 함께라면, 우리가 착한 양떼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 단락은 우선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창조신학에 대한 예수의 언급을 볼 수 있는 드문 단락이다. 하느님의 돌보심,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예수의 글을 읽는 것 같다. 예수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런 예수를 전하던 유랑 선교사들이 초대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잠잘 곳을 걱정해야 했다. 멸시와 박해도 감당해야 했다. 먼저 그들에게 예수는 따스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우리 시대에도 지구 오지에서 갖가지 어려움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그까짓 음식과 옷 때문에 하느님과 하느님나라를 잊는다 말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탓할 수도 있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선 처먹고! 그 다음에 도덕이고 나발이고”라고 부자들에게 당연히 항의할 수도 있겠다. 음식과 옷 문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상에 더 많다. 지구에 한국만 선진국만 있는 게 아니다. 8명의 갑부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연소득 절반 이상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뉴스를 나는 얼마 전 들었다.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선진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느낄 것이다. 성서 본문을 읽는 사람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본문의 강조점이 다르게 파악될 수도 있다.  


일상에서 겪는 여러 사소한 어려움을 좀 더 넓고 큰 차원에서 보면 어떨까.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1순위 아닌가. “여러분의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습니다”(34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재물은 돈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마음이다. 나머지는 다음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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