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대축일이자 세월호 참사 3주기인 16일, 4차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한 광주교구 최민석 신부님을 서울성모병원 입원실에서 만났다. 위암 3기에 대장암 2기 진단을 받고 지난 해 12월 30일 수술을 받은 최 신부님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환하게 웃으며 ‘환자 놀이’를 하러왔다고 말했다. 두 가지 암이 발견돼 수술을 받으면서도 웃으며 ‘투 스타’라고 말 할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병문안 온 신자들과 함께 둘러 앉아 그간 살아온 이야기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 (기자) 신부님은 ‘팽목항 지킴이’로도 유명하십니다. 어떻게 처음 팽목항에 가게 되셨나요?
▶ (최민석 신부) 원래 그전부터 빈민사목을 하겠다고 주교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본당 사목은 할 만큼 했고, 교회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도 부합하는 일이지요.
당시 광주교구 주교님께 빈민사목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준비 해 보라’ 하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세월호참사가 터졌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팽목항 현장이 바로 빈민사목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주교님께서 ‘나오라’하셔서 나오게 됐습니다. ‘팽목항’을 빈민사목의 현장으로 바라보고 간 것입니다.
- 신부님께서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짓고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뜻하지 않게 사제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레시오 고등학교가 운명의 갈림길 이었나요?
▶ 저희 식구들은 가톨릭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골에서 나와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주변에 신부님들이 계셨는데 주로 외국 신부님이 많았습니다. 골롬반외방선교회 아일랜드 신부님처럼, 당시에는 ‘신부’하면 외국인 이미지가 강했지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막연히 ‘국산’도 신부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처음 했고, 그 다음엔 ‘내가 하는 게 어떨까’ ‘한 번 해봐야지’ ‘꼭 해야지’로 마음이 변화한 것입니다.
- 사제서품을 받기까지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가 아마 1988년에서 89년도였는데 당시 한국 교회에 해방신학에 관련된 사회주의 계통의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해방신학에 물들어 가는 신학생들이 있다는 말이 아마도 로마 교황청 안에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신학교 안에서 그런 성향의 학생들을 제재하는 모습을 교황청에 보여주기 위한 작업을 했고 그때 제가 그 명단에 들어가면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그때가 부제 때였습니다.
- 정학의 근거가 있었나요? 정학 사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이 학생은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신앙이 바탕 되어있지 않음이 대단히 우려됨’ 이것이 정학 사유입니다. 그렇게 일 년 쉬다가 한 학기 더 공부하고 신부가 됐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쟤는 학교 때 빨갱이여서 잘렸대’하고, 소문이 난거죠.
보좌신부 생활을 일 년 하고 고흥 지역 본당에 발령을 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시민사회단체들, 농민회, 전교조 선생님들이 벌써 알고 ‘신부님이 이런 쪽에 관심이 많다면서요?’ 하고 찾아왔습니다. 사제관에 전교조, 농민회, 시민단체 식구들이 와서 여러 얘기를나눴습니다. 지역현안, 교육현안, 농민현안을 나누다가 저더러 이런 문제 관련 ‘대책위원장’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뭘 압니까’ 라고 했는데 ‘그래도 신부님이 하셔야 한다’고 하기에 ‘그냥 거기 서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90년대 초반만 해도 전교조 선생님들이 5월 5일 어린이날에 학부모들과 함께할 수 없는 아이들을 초대해 놀아주고 행사를 하는 것을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거기서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협력하고, 또 마침 90년대 초에 지방자치제가 시작이 됩니다. 지방자치제 후보자 초청 토론회를 만들어서 검증작업도 하고 그렇게 지역 일을 사제가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사람들이 끌어내더라고요. 그렇게 인생이 굴러갔습니다.
-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는 어떻게 맡으셨던 것이죠?
▶ 광주교구 현안 문제 중 하나가 영광원전 문제였어요. 그때 동창인 박재완 신부가 트랙터를 몰고 들어가 원전 대문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래서 입건이 됐습니다. 신부가 불구속 처리가 돼 있으니 그 자리에 누가 갈 것이냐 말이 많았고, 제가 그 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여러 이견이 있었습니다. 정부 측에서 신부를 불구속 입건시킨 상황에서 교회가 인사 조치를 내릴 경우 사회 압력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는 의견을 듣고 윤공희 주교님께서 불구속 처리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다음에 인사발령을 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영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서강대 환경신학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 제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가 되고 풀타임 농민회 전임전담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농민회 지도신부가 주교회의 소속이었습니다. 이후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교회의체제의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를 없애게 됐고 각 교구에서 개별적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각 교구 지도신부 중에 대표신부가 되면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상임본부장과 전국농민회 대표신부를 겸해서 하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가 대전 성남동 본당 유대철교육관 일입니다. 그곳에 가톨릭농민회관이 있었는데 역사가 20년 정도 됐습니다. 그 당시 회관을 지을 때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쌀도 팔고해서 회관을 지었습니다. 사실 천주교 신자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십시일반해서 지었는데 천주교회 이름으로 지은 것이죠. 이후에 건물이 낡고 해서 도시에 있는 것을 팔아 변두리로 농민회관을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재산이라고 주교회의에서 가져간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가 농민회관을 지어준 것도 아니면서 교회이름으로 있는 거니까 일단 보관하겠다하면서 재산권 행사를 중지시켜뒀습니다. 그때 제가 대표신부를 하면서 ‘교회가 이런 갑질을 하는 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이 시작됐고 그 운동이 생활협동조합 형태로 도시소비자 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각 교구마다 생협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쌀 수입개방정책 반대활동을 했는데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의지를 보여주신 거였죠. ‘농촌 교회가 식량주권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농촌은 몰락위기에 들어선다’하면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을 최초로 교회가 함께 시작한 것이 김수환 추기경님 때 일입니다.
- 신부님께서는 올해로 사제서품 25주년을 맞으셨죠? ‘지난 10년은 배우고 익히고 학습하는 시간이었다면 십년 이후부터는 내 색깔을 찾아가는 시기였던 거 같다. 교회는 자꾸 서양식을 강요하지만 나는 된장찌개와 단무지를 먹고 싶은 사람이다. 나한테 맞는 모습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 하셨는데 지금 그 과정 중에 계신가요?
▶ 어제 박홍표 신부와 함께 미사를 지냈습니다. 박 신부님은 신학교에 같이 들어갔지만 저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아요. 수도원 생활을 오래하다가 서른 살 가까이 돼서 신부가 되셨고 그래서 66세입니다. 같이 미사를 하는데 ‘형이 66세구나 내가 형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내가 형 나이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보다 많이 겸손해 진거죠. 전에는 66세의 형보다 내가 10년은 더 살겠지 하면서 형의 나이를 굽어 살피거나 내 삶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그런데 ‘저 나이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를 되새기면서 그 나이에 나는 ‘내 향기를 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깊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보통 신부들은 교회 사람이고 교회에 몸 바치게 됐으니 교회에 묻힐 사람이고 죽을 때 무덤까지 대우해서 보내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부였고 교회 안에서 산 것이 내 삶에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파보니 교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교회일이 바쁘니까 아픈 사람을 챙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은 아플 때 먼저 달려오잖아요. 형제의 소중함을 아플 때 처음 알게 된 겁니다. 그전에는 신부로 살면서 가족, 형제들에게 무관심 했습니다.그런데 아프니까 형제들이 그리워지고 형제들의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교회만 믿고 살다가 나중에 낭패 볼 수도 있겠다, 형제들이 많지 않으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수녀님, 신부님들은 출가하는 순간부터 왠지 가족이랑은 거리를 두고 수도자 성직자로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제가 아픈 과정에서 교회가 지금까지 소홀하지는 않았어요. 수술비 걱정을 한다든가 경제적인 부담 없이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교회가 협력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종종 아플 때 교회조직으로부터 서운함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 신부님 책 「벼랑 끝에서 날다」에 보면 특히 노숙인들에 관한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계속 빈민사목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 처음 빈민사목 일을 하고 싶어서 말씀 드렸는데 교회 안에서 빈민사목에 대한 이해정도가 서로 달랐습니다. 저는 ‘사회사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 해보고 싶었는데, 교회는 ‘사회복지’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저는 돕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왜 가난하게 됐는지’ 구조적인 문제까지 접근하고 싶었는데 교회는 이를 허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구조적 악을 제어하거나 구조적 악의 문제를 따지고 손대면 ‘빨갱이’가 됩니다. 그냥 시혜적 관점에서 ‘돕는 일’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교회의 입장인 것 같습니다.
- 신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제 생각에는 사회적, 구조적인 악까지 함께 봐야합니다. 악과 죄를 분리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개인의 죄의 문제만 다루도록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강조하고 악의 문제는 ‘손 대지마. 그거 손대면 종북이 되는 거야’ ‘빨갱이 되는 거야’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의 전반적 흐름이고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 ‘요즘 교회가 예수랑 상관없는 예수 없는 교회가 돼가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 입니까?
▶ 교회는 예수를 공경의 대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따르는 대상’은 아니라고 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교회가 전례 중심으로 가게 되는 이유는 화려하게 성사중심으로 꾸미고, 부활절 멋지게 만들고 하면서 어쩌면 ‘종교적 행위의 숭배’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복음서를 보면 ‘나를 믿어라’ 라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 했지요. 예수를 ‘스승 예수’로 얘기하는데 교회는 오히려 이 부분을 소홀히 하고 신자들에게 예수를 공경과 숭배의 대상으로만 얘기하니까 ‘종교’가 ‘삶’과 이분화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말씀 중에 ‘양심적 삶을 살아가는 무신론자가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실 ‘양심’이기도 하고, ‘깨달은 자’ 이기도 하고, ‘각자’ 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와 같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이 세상에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떼어놓고 역사적 예수를 빼 놓고 그리스도만 이야기하는 지금의 흐름들이 삶과 신앙을 이분화 시켰습니다.
- 사목활동 가운데 특별히 어느 때 그런 답답함을 느끼셨나요?
▶ 예를 들면, 지역사회 운동을 하게 됐는데 전교조, 농민회, 지역사회단체, 소비자단체 사람들과 대화하면 말이 잘 통하고 재미있다가 본당에 돌아가면 답답했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내가 소속된 집단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밖 세상과 대화하지 못하는 교회의 한계들을 느끼면서 ‘이게 맞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최근에는 춘계주교회의 의제들을 살펴보니 현재의 한국사회와 전혀 상관없는 사안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죽은 이의 매장과 화장된 유골의 보존’에 관한 문제, 또 성음악 지침 같은 것들이 지금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이 탄핵정국에, 민주주의가 크게 훼손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고공투쟁 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의 한계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논의들이 지금 왜 필요 한가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은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현장이 잘 안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는 개울가에서부터 파란 잎이 피어나듯이 현장에서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개울가에서부터 푸른빛을 만들고 희망을 만들어 산꼭대기까지 푸른빛으로 물들이면 여름이 되는 것처럼 희망은 밑에서부터 만드는 것인가 봅니다.
청와대가 우리를 춥게 만들었습니다. 정치권력의 한 정점이 서민생활을 얼마나 춥게 만들었습니까? 겨울은 산꼭대기부터 시작되고 봄은 산 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겨울에 촛불집회 하느라 다들 많이 추웠잖아요.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전 국민의 의식을 깨우고 젊은이들의 의식을 깨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교회에서는 ‘순명’을 강조합니다. 순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 순명은 사실 교회 어른들한테 하는 게 아니고 하느님께, 내안의 ‘양심’인 성령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양심에 순명하고 양심의 뜻을 지키는 게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고 성령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명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강요하는 순명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순명을 ‘모심’이라고 달리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고 생명으로 모시는 것,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모시는 것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말하는 ‘순명’은 아무리 봐도 어느 문화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올해 부활주일이 세월호참사 3주기와 겹칩니다. 이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 ‘별이 된 아이들’ 광화문에 촛불을 밝혀준 아이들입니다. 별이 된 아이들이 이번 촛불대선과 탄핵정국을 만드는 힘이 되었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끈질긴 싸움이 있었습니다.
‘별이 된 아이들’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엄마 내가 왜죽었어’,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거야’, ‘왜 나를 구하지 않았어’ ‘그 이유가 뭐야’ 아이들의 질문 앞에 유가족 부모들이 서있습니다. 그 물음에 다 답변해야합니다. 그 질문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왜 죽었어, 왜 구하지 않았어’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기본적인 책임 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아이들한테 말해줘야 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이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온 국민이 계속 노래를 부르며 어둠의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근간에는 ‘별이 된 아이들’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본권력 앞에 너무 쉽게 무릎 꿇었던 나 자신, 정치권력 앞에 쉽게 무릎 꿇었던 나 자신이 더 이상 아이들의 질문을 외면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3주기 부활절은 어둠에서 빛을 끌어내는 몫, 거짓에서 참을 끌어내는 몫,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선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엊그제 세월호 엄마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엄마들이 꽃을 눌러 만든 ‘압화’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꽃다운 아이들의 꽃 같이 예뻤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더 이상 아프지 않는 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가족들은 아이들을 위해 압화도 붙이고, 편지도 쓰고, 유가족 합창단도 만들어서 노래로 투쟁하기도 하고, 예술로 투쟁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기억을 밖으로 드러냈습니다. ‘투쟁이 전 방위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구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 엄마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무엇이 제일 차이가 나냐 물었더니, 세월호가 보일 때와 안 보일 때의 차이가 크다고 합니다. “세월호가 밖으로 드러나면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해냈다는 느낌이 든다. 그전에는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리 활동해도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세월호가 나온 것을 보면서 이제 출발했다 생각이 든다. 조금 간 것 같다 앞으로 더 갈 수 있을 것 같다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 아픈 가운데 시간 내어 값진 증언, 나눔 해 주신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암치료 무사히 잘 끝내시고 다음번에 조금 더 살찐 모습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