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0일 목요일, 흐리다 비
남진수녀가 저녁 미사 전에 예천에 도착해야 한다며 아침을 먹자 떠난단다. 수도자들이 자신의 일에 매여 스스로 선택한 순명을 보노라면 가정생활을 느슨하게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존경스럽다. 무서운 시어머니 밑에서 눈치를 보며 쫓기듯, 누구에겐가 순종하는 삶은 ‘자발적 순종’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거쳐 자신을 담금질하는 여정이다.
빵고가 ‘본가 방문’(本家訪問: 휴가를 얻어 집에 오는 일을 수도자들은 이렇게 부른다)을 하고 돌아갈 때 저녁기도 시간까지만 가면 되는데도 아침을 먹고 벌써 집을 나선다. 맘속으로는 ‘점심을 함께 하고 가도 되는데…’ 하면서도 붙들지 못한다, 수도원이 자기 집이 되었고, 사람은 가고 싶은 길을 갈 적에 비록 고되더라도 행복하기에…
에스텔 수녀를 차부에 데려다주러 간 길에 연수씨가 새로 맡은, 시장 안 ‘강소농’ 매장엘 가 보았다. 밖에 있는 공영주차장 관리까지 맡았고, 회원들은 양파 밭 풀 뽑기에, 감자순 다듬기에 바쁜 절기여서 회장인 연수씨가 어쩔 수 없이 주차요원이 되고 말았단다. 고객의 태도가 각양각색으로 500원씩 받아 하루에 80,000원을 만드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단다.
나도 그니에게 주차비를 내고 채소 모종을 사러 갔다. 요즘 봄철이라 함양 시장은 평일에도 온갖 모종으로 가득하다. 긴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씨 뿌리고 저 어린 생명들을 돌보고 키워냈을까! 전년 같으면 호박이나 수세미는 내가 씨 심어 싹틔웠을 텐데 서울에서 너무 긴 시간을 지내고 온 터라 사다 심어야 한다. 1,000원에 두세 포기 주는 가지, 고추, 도마도, 수세미, 호박 모종을 사들고 돌아오는 기분은 봄의 전리품을 한아름 안고 귀향하는 흐뭇함…
집에 돌아와 지난번 멀칭해둔 이랑에 모종을 널찍널찍 심었다. 씨가 되려고 기다리는 쪽파를 뽑아다듬고, 양파 밭도 맸다. 일주일은 땅을 기며 사죄를 해야 땅심이 서운했던 마음을 돌려 나를 받아 줄 게다. 그래도 땅은 고향이어서 늘 맘이 넉넉하다.
배꽃이 다 졌다
뒤꼍 가죽나무 순도 꺾고, 머위와 곰취도 뒤꼍에 가득한데 옆집에서 얻은 두릅과 인규씨가 따다 준 엄나무순이 있어 꺾지 않았다. 배나무 밑에는 신선초, 참나물, 우엉, 어성초, 방풍, 섬초롱이 가득해서 잡초가 자라오를 여지가 없다. 쥔이 없어도 식물은 텃밭을 단단히 지켰고 씨를 맺는 채소(루콜라, 비트, 돌산 갓)는 다음 세대를 기약하고 있다.
벚꽃도 지고 배꽃도 졌지만 ‘이 환장할 봄날에’(박규리 시인의 시집 제목), “소쩍새 우는 봄날에” 이랑을 타고 앉아 풀매는 일은 참 흥겹다.
이내 몸, 이 폭폭한 마음
소리없이 스러지는 어느날, 그렇게
부서져 고요히 가라앉으면
다시 소쩍새, 다시 소쩍새 우는 봄날에
양지바른 숲길에 부풀어오른
왜 따스한 흙 한줌 되지 않겠습니까
지쳐 잠든 그대 품어안을
눈물겨운 무덤 흙 한줌, 왜 되지 않겠습니까 (박규리, “소쩍새 우는 봄날에”에서)
오랜만에 이웃 소담정엘 들렀다. 도메니카가 반가워하며 차를 내준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이 심심 했던지 할 얘기가 끝이 없다. 병수씨가 나한테 부탁한, 민주당 휴천면 투표소 참관인을 같이 하자고 그니에게 제안했다.
선거 때마다 이곳 경상도에는 야당 참관인이 한 명도 안보여 속상했지만, 이번에는 주인의식을 갖고서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했다. 5월 4일과 5일(부재자 투표일), 그리고 9일 세 번,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자리를 지키면 된단다. 그렇게라도 내가 내 나라 민주화에 봉사할 기회여서 기쁘다. 수당도 준단다.
문하마을에 새로 세워진 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