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덟 명의 참석자가 경동교회에 모여 레페스포럼을 진행했다. 이번 포럼에서는 고모리 요이치의 「인종차별주의」(푸른역사, 2015)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동일성의 추구가 배타와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가능한 경우에 대해 토론했다.
참석자 :
오현석(북경대 박사과정, 종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신학/철학)
이명권(코리안아쉬람 대표, 종교학/중국철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이현아(경동교회 준목, 기독교교육학)
전철후(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홍정호(연세대 객원교수, 선교학/정리)
정체성과 차별성
이찬수: 오늘 토론거리 중의 하나가 ‘정체성’의 문제다. 영어로는 ‘아이덴티티’(Identity)다. 독일에서 나치의 억압을 피해 온 미국으로 온 심리학자 에릭슨이 자신의 뿌리를 고민하고 학문화하면서 학계에 알려진 낱말이라고 한다. 영어 ‘아이덴티티’가 정체성과 동일성이라는 뜻을 모두 의미한다는 데에 함축되어 있듯이,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의 추구가 지속적 동일성의 추구로 나타나고, 그 동일성은 차이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미국 백인의 정체성/동일성은 흑인을 거부해왔고, 남성의 정체성/동일성은 여성을 소외시켜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한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을 찾는 과정에 영국과 차별화하면서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이 이른바 미국의 독립이다. 정체성은 타자의 억압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추동하기도 하고, 타자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기도 하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종교적 정체성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비기독교를 배타하는 행위로 연결되기도 한다.
정주진: 정체성이 연관된 갈등은 무력 분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내전이 정체성 갈등에서 시작된다. 정체성은 평화와 폭력의 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쪽은 보통 상대적으로 약한 집단이다. 대개는 폭력의 희생자다. 정체성과 관련된 차별의 문제를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강한 쪽에서는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차별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는 차별을 당하는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다. 그렇게 얘기하는 쪽은 상대적 약자다. 그래서 차별을 말할 때는 힘의 관계를 이야기 해야만 한다. 차별은 힘의 관계를 나타내 주고, 힘의 관계가 잘못 작동된 것이다. 차별과 힘의 관계는 폭력이라는 맥락에서 심도 깊게 살펴보아야 할 주제이다.
얼마 전에 「지위경쟁사회」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경쟁의 내용보다는 순위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지위경쟁’이다. 강남 사람들은 강북 사람들과 다르다. 가는 백화점도 다르고, 이용하는 문화 지역도 다르다. 차별화를 통해 우월주의를 내면화시킨다. 문제는 사람들이 지위경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차별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 ‘차별’이라는 낱말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행위 안에 내재되고 지속된다. ‘지위경쟁’의 내면화를 통해 지역이나 집단 간 차별이 더욱 고착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이찬수: 고모리 요이치의 「인종차별주의」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롯폰기 힐스’는 동경의 부자 동네다. 일본에서 ‘롯폰진’, 그러니까 ‘롯폰기 사람’이라는 말이 마치 새로운 인종을 가리키는 용어처럼 쓰이고 있다고 한다. ‘롯폰진’ 자신도 자기가 일본 내 다른 우월한 신분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을 갖는다. 이를 바탕으로 비롯폰진에 대한 차별의식을 내면화하게 된다. 개신교가 20세기 초 한국에 뿌리내리게 된 배경에도 일종의 지역적 차별의식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 대변되는 어떤 선진적 문명에 편입되고 싶은 열망이 한국 개신교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마음으로 개신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차별을 피하기 위한 선택으로 개신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만, 개신교적 정체성이 분명해지고 나서 다시 타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내면화시킨다는 점이 문제다.
정주진: 개신교는 한국전쟁 후 노골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에 기대 구호사업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국 내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반성은 기독교 내 소수집단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다
이관표: 앞서 논의된 사항들과 다른 관점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조금 더 근원적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바로 영어 ‘아이덴티티’라는 용어의 번역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차별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 나온 대로 ‘아이덴티티’는 철학에서 ‘동일성’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자기규정을 위한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누가 봐도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백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즉,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이와 동시에 차별을 긍정하는 원리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정체성과 차별은 분리될 수 없다. 사실,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삶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출발점은 다름 혹은 차이이다. 다름 혹은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이 결국 차이를 차별과 혼동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더욱 더 정체성확립이라는 변명을 가지고 동일성의 논리를 강대하게 확대시키고 있다.
이찬수: 자기의 정체성은 자기가 주장한다고 확립되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동의를 받을 때 확립될 수 있다. 남들로부터 동의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남들과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내기 위해 자기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얼마나 배타적인지 비판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정주진: 정체성을 남으로부터 확인 받기 위해 자신의 특징을 버리고 동화되려는 시도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확인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건 관계가 형성됐다는 것인데 그 관계에는 끊임없이 힘이 작용하게 된다. 힘이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힘이 배제된 관계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양한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사회에서는 힘의 작용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경우가 당연히 덜하다.
이명권: 우리의 사회 현상을 보면 묘하게 돌아가는 부분이 있다. 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하고, 가해자는 정체성을 가치중립적으로 두려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촛불 집회에 대한 안티로 박사모들이 태극기 물결을 이루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 확인하는 과정으로 삼기도 한다.
이관표: 한번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정체성 확립을 따돌림, 차별, 그리고 미움 등으로부터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왕따를 시키는 이유는 자신들의 삶의 확인, 즉 살아있음을 느끼는 희망을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나 ‘극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분명한 진리를 알고 있는 착한 사람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절대악으로 규정해버린다. 신앙이 다른 것은 우선 단순한 신념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한 차이로부터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과 악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에서는 그 차이를 차별을 정당화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는 큰 문제를 지닌다.
오현석: 무엇을 기준으로 차이를 분별해 내느냐의 문제도 중요하다. 차이를 하나의 기준에만 근거해 만들어 내려는 시도 역시 폭력적이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서 ‘글로벌 인재’를 만든다고 하는데, 거기서 ‘글로벌’하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일정 수준의 외국어 능력을 갖추면 ‘글로벌’해지는가? 물론 외국어 능력은 중요하다. 차이를 이해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나와 다른 것과의 만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내가 발견하고 체험하는 ‘차이’가 아니라면 그것은 실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이에 대한 감수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나 대학이 ‘글로벌 교육’이라고 외칠 때, 내가 느끼는 ‘차이’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차이’를 잘 습득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상식을 넓히기 위해서 상식 책을 사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확대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의 기준이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글로벌’의 기준이 아닐까?
이찬수: 차이에 정체성이 개입이 되면 차별이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여기에 첨언하자면 차이에 동의하는 이들 사이에 공범이라 할 만한 그룹이 형성되고, 그 그룹 밖에 있는 이를 차별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차별화의 기준을 어디에 둘까
이명권: 인식은 또 종교라는 틀 안에서 놓고 보면 다양한 인식론이 있다. 인식론은 결국 세계관이다. 당연히 기독교적인 인식론은 배타적일 수 있다. 종교마다 인식론이 다르기 때문에 불교적 인식 역시 관계 인드라망의 인연연기 속에서 공간적 사이의 소중함을 이야기 한다.
목사의 정체성의 이야기 역시도 그러하다. 목사라는 직분도 예수의 정신이 사라지고 권력화 되고 구조화되고 폭력화된 이름의 정체성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듯하다. ‘탈목사화’하고 싶으면서도 예수정신은 벗어 던지고 싶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소수자로서의 새로운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벗어버려야 하는지 고민이 있는 듯하다. 인식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차별과 정체성의 문제도 달라질 것이다.
이현아: 사회적으로 보면 왕따를 시키는 가해자 집단이 힘이 있는 집단이며 상대적으로 주류가 되고 있다. 무언가 분위기도 이끌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만 보면 차별을 하는 주체가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들이 차별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고립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태극기 부대나 기독교정당이 힘 있는 부류는 아닌데 스스로 고립된 채 차별을 조장한다. 스스로 차별을 당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주진: 차별이라는 언어는 차별을 당하는 쪽에 피해가 가고 있음을 내포한다. 자기들끼리 동질감을 형성하고 ‘우리는 약자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을 차별할 거야’라고는 하지 않고, 그런 차별은 작동하지도 않는다. 상대 쪽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차별이라고 할 수 없고, 결국 그런 차별을 가할 수 있는 것은 강자다.
차별과 구별
이명권: 사회적 맥락에서 차별은 경멸의 의미를 말한다. 선의의 차별이라는 것도 광의의 의미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경멸적 차별을 말한다. 여기서는 구별과 차별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유교 전통에서도 부부유별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적 체계에서 보듯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그런 정도의 유교의 강한 반대 입장에서는 부부유별은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한다고 본다. 반면에 원시 유교적인 공자의 이상적 측면에서는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다. 역할의 구별로 보는 것이다.
이찬수: 정말로 차별 아닌 구별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이 들기도 한다. 구별이 정말 구별로 기능하려면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차별이 내재해 있다는 뜻 아닐까. 차별을 속에 간직하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정도를 구별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차별과 구별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특히 종교에서는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가령 악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어야 악을 극복하기 위한 저항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차별이 폭력이 아니라 평화로 작동하려면 좀 겸손한 차별이라는 것을 동력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차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명권: 그 부분에서 영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구별이냐 차별이냐? 차별 없는 구별이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했을 때, 우리가 일단 기독교의 예수정신을 놓고 볼 때 예수가 구별을 했지 차별은 없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예수의 폭력적 의미의 차별은 전혀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구분을 했다. 그 시대의 정치와 로마 체제의 상황 속에서 세금 내는 등등은 그대로 하고 ‘신적 질서’는 또 다르게 구별하여 주장 했다. 신적 질서는 절대적인 평화에 입각한 절대적 기준이었다고 본다. 그것이 영성이지 않나 한다.
바울의 14장 17절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아니하고 정의와 평화와 희락(기쁨)이다’ 정의와 평화와 희락이라는 세 가지 말로 하느님의 나라를 바울은 요약을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신적 질서를 만들기 위한 예수의 몸부림은 가이사의 것과는 다른 구별적인 무언가를 표현 해 준 듯하다. 거룩이라는 것이 형식화되다 보니까 율법주의가 되고 배타주의가 되는데, 거룩 그 자체가 처음 발생한 원시적 종교체험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신비적 체험이라 볼 수 있다.
체험은 굉장히 소중하게 봐야 한다. 그렇다고 성속이 분리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속’ 속에서 ‘성’이 드러나는 구조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주변인을 만드는 폭력
이관표: 얼마 전 미국 드류대학교의 한국인 교수였던 이정용의 「마지널리티」를 보았고, 또 아는 학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했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마지널리티란 바로 메이저에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 혹은 경계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주변인과 경계인은 늘 메이저로부터의 폭력에 노출된다. 왜냐하면 주변인과 경계인은 분명 메이저와 ‘다른’, ‘차이나는’, ‘낯선’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널리티’라는 어떤 개념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이미 폭력의 출발점이다. 다름이 폭력이 되며, 이 다름 때문에 중심과 주변이 나누어지는 현상은 이미 차이가 차별을 부르고, 그 차별이 다시금 폭력으로 연결되는 아주 정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중심부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폭력은 법정초적이든지 혹은 법수호적이든지 동일한 폭력의 범주 안에 속한다.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경찰들의 폭력은 옳고 반대되는 혁명적인 입장은 나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경찰들도 법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고 있는 셈이다. 모든 이들이 주변인으로 존재할 뿐이며, 모든 이들이 주변인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이들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여기에서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망상을 꿈꾸면서 단순한 이름을 구실삼아 다름을 폭력으로 제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다름으로 점철된 주변인들일 뿐이다. 우리는 차별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안에 놓여있다. 오히려 이러한 모순적 행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정신,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 정신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나는 차별하지 않지만, 내가 받는 차별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그것을 다른 곳으로 전염시키지 않는 자기희생이다.
조금은 생물학적인 방법론으로 추론해보자면, 나는 종교가 전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죽으라’는 신의 명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은 살라고 말한다. 내 마음대로, 내 모든 것을 유지하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말고 힘의 의지를 따라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생물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욕정과 욕망의 원리일 뿐이다. 오히려 신은 전체 생명의 유지를 위해 신앙인들이 희생하고 죽으라고 제안한다. 의미 없거나 무가치한 그런 죽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그런 자기 비움을 종교는 명령한다. 다른 이들의 차이를 견뎌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이 나에게 가해오는 차별을 내가 감내하면서 나를 죽이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이며,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들만의 영성
정주진: 앞에서 영성을 이야기 했는데 영성이나 성서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분들이 과연 차별과는 거리가 먼지 의구심이 든다. 영성은 그들 나름대로의 영성이지 보편적인 영성까지는 포괄하지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종교 안에도 계급주의가 있다. 교회 안에도 계급주의가 있는데 그런 계급을 지속 시키고 유지하는 사람들이 영성이 없느냐? 그렇지 않다. 영성이 있고 영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들의 영성을 딱히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무작정 수용할 수도 없다.
성서의 가르침은 거부할 수 없는 영성인데 현실은 제도화된 조직 속에서 끊임없이 구별 같은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별과 차별에 대해 차별하는 쪽은 구별이라고 하지만 차별 받는 쪽에서는 그것은 구별이 아니고 차별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차별일 수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계급적인 것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한국문화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고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나 환경을 보면 확실히 그것은 차별이다. 그런 방식으로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것들이 관습이나 전통과 섞여서 차별이 작동되는 데 그것이 영성으로 극복되느냐? 그렇지 않다. 때문에 영성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에 저항하는 태도와 행동이 동반돼야 근본적으로 차별이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영성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안목과 비판을 같이 수용해서 담아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 안에서나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는 차별이 없어질 수 있다.
이명권: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사회적 해방적 비움의 영성이다.
정주진: 하지만 그 영성을 말하는 목회자들조차 차별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는가를 보면 치열하게 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하지 않고 그들만의 사회 안에 속해 있으면서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 속에 계속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것을 깨기 위해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지 않는다.
예수도 시대의 아들
저는 예수가 12제자를 남자만 뽑은 것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우연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가톨릭은 지금까지 그것을 근거로 들어서 여자 사제는 허용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예수도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수준 밖에 안됐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부분이 항상 궁금하다.
또 예수가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 부분에 문제제기를 한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는 부분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한테는 눈앞에 닥친 큰일인데 예수는 그것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찬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많이 오해 또는 오독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히 부엌일 보다 성서 공부가 중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대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예수는 자신의 일행을 맞이하느라 부엌일에 분주했던 마르타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예수도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여성도 율법을 공부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지독한 남성중심 사회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수를 만났으면 예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대면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예수도 시대의 아들이라, 오늘의 페미니즘적 안목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히 있다.
정주진: 그런 해석을 달아도 여전히 만족스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마르타의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동의한다.
이찬수: 여성들의 현실과 형편에 대해 이해는 되지만,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오늘날 맥락에 어울리게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정주진: 미화시키려는 해석이라 생각된다.
이관표: 남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남자로서 가끔 불편한 성서의 구절과 해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열 처녀 비유인데, 시집간다는 것이나, 신랑을 기다린다는 것 등이 조금 어색하고 그렇다. 남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아마도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정주진: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부분 또한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명권: 이미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데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가부장적 체제에 대해 익숙한 제자들이 그런 표현을 썼다. 그것도 성서 자체도 시대적 산물인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예수 자신의 말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증명 된 것 없다.
정주진: 그런 예수의 태도와 행동을 지금 시대에서 재해석하지 않고 절대적인 것으로 교육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찬수: 가령 ‘하느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라는 구호는 얼핏 멋있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정의와 평화도 누리는 자와 누리지 못하는 자가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만일 자기중심적으로만 해석하면, 그 정의와 평화가 자기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착각될 수 있다. 구약성서도 자기집단 중심적인 해석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지금 내가 말하는 평화가 정말 평화인지 다시 판단하고 적용해야 한다.
의심하는 전략
이관표: 언어의 문제는 복잡하기 때문에 섣불리 없애자고만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오히려 전략적인 언어는 타당하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의 말들을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와 사고로 지속적으로 해체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 반가부장적, 반인간중심적, 반인종주의적 해체와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해체와 해석을 통해 분명히 앞서 언급한 종교언어의 비판들은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해체와 해석 이전에 늘 우리의 삶과 현장 안에 차별이 들어와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 성서는 차별적 용어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적 한계로서, 인간의 이해를 위한 차별의 용인일 뿐이지 결코 존속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해체와 해석은 우리가 마음대로 수행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늘 명령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찬수: 답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고모리 요이치가 제시하는 대안은 ‘의심하는 전략’이라는 표현이다. ‘이거다’라고 단정하지 말고, 한 번 더 의심해보는 것이 폭력이 되지 않도록 하는 철학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정주진: 저는 ‘의심하는 전략’이 참 괜찮다고 생각한다. 의심을 보통 부정적인 태도로 보지만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한 원로목사님이 저희 교회에 와서 은퇴하고 하시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제가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농담처럼 ‘교회에서 의심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시더라. 그래서 제가 ‘의심을 해야지요. 의심을 안 해서 이 나라가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었다. 그분이 그렇게 완고한 분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그런 은밀한, 또는 직접적 방식으로 생각을 억압하는 일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의심을 자꾸 부정적으로 보는 데 의심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자꾸 의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종교 안에서는 의심을 불손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관표: 자기 성찰이나 결단의 문제 등은 결국 해석학적 순환 안에 놓여있다. 의심이란 제대로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에서는 의미 없지만, 건강하지 못하고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진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민중신학에서 군사정권 시대에는 오히려 사람들과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졌던 그런 것들이 오히려 더 진실을 담고 있었다. 광주항쟁에 대한 소문도, 여러 가지 저항들의 이야기들도 모두 신문에는 나오지 못했거나 왜곡되어 전달되었지만, 소문은 정확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예수 시대의 성경도 그랬을 것이다. 핍박 받고 있을 때 로마가 이야기 하는 구체적이고 정중한 문서들은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이단이고 잘못된 사당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초기 기독교에 돌았던 이야기들은 예수의 사랑을 분명하게 전하고 표현하는 진실된 매개체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의심은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이며, 이 의심을 통해 끊임없는 담론들을 만들어 가는 것들이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인종차별주의를 극복 해 내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정주진: 그렇지만 여전히 의심의 전략이 종교 안에서 정말 독려되고 확대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찬수: 종교라는 것이 ‘내적인 경험 세계’와 ‘조직과 제도 등 외적인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의심은 조직과 제도를 흔드는 행위일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조직과 제도가 인간을 대체하고 인간은 그 종속물이 되고 만다.
차별인가 문화 차이인가
오현석: 우리가 다른 문화를 대하는 시선이나 기준이 항상 궁금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근본적으로 닿아 있기 때문이다. 저는 중국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중국문화를 보는 나의 시선을 돌이켜볼 때가 많다. 생활에서 부딪치는 이야기를 하면 중국의 문화가 충격적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북경 시내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4차선 도로였으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버스정류장에도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버스 정류장 표지판에 대고 오줌을 누게 하더라. 그런데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태연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나는 문명이고 저들은 비문명인가? 그리고 제가 중국에 대해 다루는 자료들은 대개 불어로 된 것들이다. 그것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서양인의 시선으로 중국을 보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적 접근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딪치면 그렇지가 않더라.
정주진: 저에겐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좀 오래 전에는 시골 같은 데에서 그런 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야만적으로 보자면 우리도 오줌 싸면 아랫도리 벗겨서 키 씌워서 내보냈던 문화가 있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니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한다.
오현석: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오줌을 누게 하는 것은 사회 공동체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다. 그것을 존중해야 할 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일을 몇 차례 겪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다양성의 감성’을 다시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도 나와 그들을 구분하고 있이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명/비문명의 구분으로 말이다.
불이익을 주어야 차별이다
정주진: 차별은 아닌 것 같다. 왜냐면 그 생각이 그 사람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들은 차별에 대한 얘기는 몇 년 전에 후배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 후배가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병원 간병인들 중에 조선족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환자들과 가족들이 그렇게 차별한다는 것이다. 청결하지 못하고 더럽다는 이유로 말이다. 딱히 불결하지도 않은데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불결한 곳에서 살다 왔다고 환자들이 생각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의심을 하고 깨끗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더란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들은 그런 선입견 때문에 더 깨끗이 한다고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이명권: 하지만 이러한 차별도 있다. 요즈음은 다르지만 얼마 전만 해도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족과 한족의 차이를 이야기 하면서 조선족은 쌀을 씻어서 걸러 내고 밥을 하지만 한족들은 쌀뜨물이 아까우니까 그냥 밥을 한다. 덜 깨끗한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선족들은 한족들을 중국 내에서 차별한다. 그러니까 무시한다. 근래까지도 도시 말고 시골을 가면 조선족이 한족보다 훨씬 깨끗하게 생활한다. 그 문화 속에서는 상당히 깨끗하게 살고 있다.
스스로 차별 안에 갇히려는 사람들
이관표: 아까 이현아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내용들도 중요하며, 잠시라도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다루었으면 한다. 앞서 이야기된 것은 자신들의 잘못된 신념에 의해 완전히 갇혀버린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즉,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고집으로 차별을 하고 갇혀 버리는 경우이다. 어떤 연구소에서 보니까 일본이 사토리 세대가 그렇다고 한다. 더 이상 무언가 하고 싶지 않고 그저 놔둬지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는 그 사람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더욱 더 자신들의 허무함을 견고하게 만들어 낸다.
이현아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그 사람들도 신앙자체가 더욱 견고해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염려해야 한다. 차별이 판치는 사회는 그 사람들의 허무함, 무능력 등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차별 안으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뛰어들어서 자신들을 가둬버리고 거기에 안주하려고 한다. 과연 종교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또한 어떻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인가?
이현아: 실례로 광화문 사거리에서 지나가는데 세월호 광장 맞은편에서 아저씨 혼자 방송을 하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분은 오히려 너무 당당하다. 오히려 차별을 바란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하나는 제가 WCC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아저씨가 거기에서 인분을 뿌리려고 했다. 그분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고립을 정당화하면서 모두를 차별하는 길을 택했다.
이관표: 오히려 차별을 통해서 정체성을 강하게 만들면서 더욱 더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으로 가는 것 같다.
정주진: 그 사람들이 어떤 교육이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자발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밖으로 내보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 사람들도 폭력적인 구조나 문화의 피해자인데 그러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측은함만 가지고는 안 된다. 분명히 종교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에서 정당하게 판단하고 처벌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구체적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기기 때문이다.
태극기 집회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민주사회의 질서와 법치가 적용이 돼서 그 사람들의 의견도 정당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의 법질서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군가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적으로 다뤄야 하지만 말이다.
견딜만한 차별과 견딜 수 없는 차별
홍정호: 앞서 정체성 얘기를 하셨는데, 차별을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고프먼(Erving Goffman)에 따르면, 정체성이란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타인과 어울려 수행하게 되는 일종의 배역과 같은 것이다. 배우가 상황에 따라 배역을 적절히 소화해 내듯이 정체성은 그렇게 연기될 수 있을 뿐 어떤 본질에 속한 것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차별에 대한 인식도 정체성의 수행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내가 반대해야겠다고 여기는, 아니 내가 반대할 것을 기대하는 관객/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에서만 나는 차별에 대한 반대를 연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걸 ‘진심’이라고 믿는 건 본인의 자유이겠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말이다. 반대할 만한 차별에만 반대할 수 있다.
정주진: 다양한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차별할 수도 있고 차별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홍정호: 그보다는 정체성 인식의 조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견딜 만 한 차별과 견딜 수 없는 차별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정주진 선생님에게 견딜 만 한 차별이 저에게는 견디기 힘든 차별로 인식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견딜 수 있는 차별과 없는 차별의 기준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개인마다 다르고, 한 개인에 있어서도 삶의 시기마다,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마다, 나아가 실존적 상황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다 다르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조건을 열거하자면 무한에 이른다. 그러니까 모두가 반대해야 한다거나 모두가 견뎌내야 할 그런 차별은 없다고 본다. 나/너는 견딜 만하니까 견디는 거고, 너/나는 못 견디겠으니까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나는 견딜 만한데, 너는 왜 그것도 못 견디느냐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못 견디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못 견디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우리는 왜 이게 견딜 만한지, 어떤 조건들이 나/우리로 하여금 남들은 견디기 힘든 이 상황을 그럭저럭 견디도록 만들어 주는지, 그러한 조건들은 과연 차별을 배제한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정주진: 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공존하는데 어떤 정체성이 공격을 받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직면한 상황에서 위계의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에 대한 차별이 이뤄지면, 그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 저항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냥 대충 감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치는 연기다
이찬수: 자아를 연기한다는 말이 많이 와 닿았다. 한나 아렌트도 민주 정치를 위해서는 액션, 즉 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대로 직선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내면은 자제하고 상대방은 배려하는 식의, 그러니까 그 때 그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하되, 고통으로 인한 상처를 줄여가는 방향으로 연기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일 것 같다. 차별 없는 구별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구별이 누군가에게 견디기 힘든 차별이 되지는 않도록 연기하는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그것이 민주정치의 기초고, 평화의 동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