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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김웅배
  • 등록 2017-06-01 14:02:29
  • 수정 2017-06-01 18: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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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은 사막으로 민가도 없어 강도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그때 어떤 유다인이 혼자서 그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그는 속절없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게다가 얻어맞아 거의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때 마침 길을 지나던 사제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 중이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런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일어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자신의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볼 뿐만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비용까지 얹어주며 자신이 되돌아 올 때까지 그를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루카 10, 30-35)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모든 비유 중에서 현실적이면서도 또 한편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옛날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시대에는 횡액을 당한 사람들을 발견하면 먼저 본 사람이 조치를 취해야 하겠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일단 119에 알리고 현장 유지에 최선을 기해야 하는 것이 룰처럼 돼있다. 함부로 피해자를 옮기거나 손을 대면 사건 현장의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격자로서의 진술도 해야 하니 사실상 이런 사건에 연루되면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 보면 당시 유다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의 입장과 행동은 지금 같으면 오히려 가해자로서 누명을 쓸 수 있는 입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현대인이라면 가급적 그런 상황을 피하려는 경향을 함부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은 거의 비유로 나타난다. 그분은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면 뜻이 전달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거의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다. 


성경 주석자들에 의하면 이 비유는 예수 시대 실제 일어난 사건을 예화로 들었다는 설도 있고 강도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인을 예수의 전형으로서 은유적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던 이 비유의 핵심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는 그의 출신 성분 종교 빈부의 차이 혹은 민족적 선입관 등을 버리고 어떤 경우라도 이웃이 되어주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이렇게 생면부지의 사람을 모든 여건을 무시한 채 개인적으로 끝까지 도와줄 사람이 몇몇이나 있을까?  


도대체 끝까지 끈질기게 피해자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팍팍한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면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이웃이 되라는 것은 성인군자가 되라는 것보다 더 과한 주문이 아닌가 싶다. 이 비유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로서는 듣기에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모난 놈 옆에 가면 정 맞는다든지 무슨 싸움이 났을 때는 절대로 끼어들지 말라는 우리 옛 어머니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아마 비슷한 의미로 한국의 촛불 혁명 초기에도 이러한 스스로의 검열로 많은 이들이 집회 참석을 주저했을 것이다.


본문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 직전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있다. 황금률과 더불어 그 유명한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루카 10, 25-28)


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멋진 말인가! 얼핏 보면 행동보다는 마음가짐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도 하다. 입술로만 마음으로만 하느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할 자가 누구인가? 마음속으로, 머릿속 생각만으로 한다면!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넘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하느님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내 이웃의 신원이 고통 받고 있는 불특정인 이란 사실이 명확해지면서 우리는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우리가 강도의 피해를 당한 사람을 위해 사마리아인처럼 직접적 행동을 취하느냐 아니면 사제나 레위인처럼 마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실제 행동을 하지 못하면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내 이웃의 개념은 ‘우리와 더불어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이웃의 개념이 다르다. 또한 우리가 살면서 자연스럽게 맺어진 이웃이 아니라 누구라도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는 얘기다. 


예수님이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신 그 ‘이웃’은 한번은 보았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수도 있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신 예수님이 아닌 담에야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 당신은 절대자이시고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아는 사람만이라도 서로 도울 테니 제발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소서!’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옛 이스라엘 예리코 가는 길만큼 험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사마리아 인처럼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기회도 그리 많지 않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많은 사람이 몰려 사는 도시일수록 사회 안전망은 그런대로 돌아간다. 사건 사고가 많으니 그만큼 시스템도 정착되어 있다. 부연하자면 강도를 당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도와줘야할 상황은 정말 특별한 경우 외에는 접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강도 피해 사례가 많다. 피해에 따른 트라우마 치유에 많은 노력도 기울이고 공공의 안녕과 사회적 안전망 확충에도 제도적으로 힘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는 부패하고 악질적이고 무능하기까지한 권력에 의해 또는 부당한 신자유주의 질서 안에서 알게 모르게 구조적으로 강도를 당한 사람들이 실제로 강도를 만나 피해를 보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근세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극동의 신흥 깡패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강도당했고 꽃다운 조선 소녀들의 정절을 강도당했다. 대국이란 이름의 국제 강도들에게 나라가 반 토막이 났고 저희들 싸움에 애꿎은 약소국 민초들의 수많은 생명이 강도당했다. 독재에 항거해 꽃피워 가던 민주주의가 군사쿠데타 반역자 무리들에게 강도당했고 군부 독재의 무자비한 철권통치로 천부의 인권이 강도당했다. 총칼로 위협하며 갓 피어난 민주화의 새싹을 또 다시 군화 발로 짓밟고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강도질 했다. 


4대 강 등 천연 자연 환경이 국가 경제를 사유화한 천박한 지도자에 의해 강도당했고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혈세를 강도질 했으며 방산비리로 국방력을 강도당했다. 제주 강정의 아름다움은 군사 시설의 이름으로 강도당했고 밀양 어르신들의 터전은 송전탑에 의해 강도당했다. 정권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박는 대신 밥줄을 강도질 하고 종북좌파 세력을 척결한다고 개성 공단을 폐쇄해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강도질 했다. 


세월호의 무고한 어린 학생들의 창창한 미래가 청와대의 어리석은 이에 의해 강도당했고 국민 주권은 박근혜에 의해 최순실에게 강도당했다. 농민들의 아픔을 대변한 백남기 임마누엘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생명을 강도당했고 불법적 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생계를 강도당했다. 세월호에 아이들을 구하려다 같이 희생된 선생님들은 기간제교사라는 이유로 생명과 함께 명예도 강도당했다. 블랙리스트로 표현의 자유를 강도당한 예술가들은 또 어떤가!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권력자들이 강도로 돌변한지 오래다. 어마어마한 촛불의 힘으로 이제서야 겨우 강도들의 면상을 똑똑히 알아보게 됐다. 강도들을 식별해 징벌을 가하는 건 정당한 공권력이 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강도당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기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원상회복을 해 주어야 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사마리아인에게서 예수 성심을 바라봐야 한다. 공동선을 위한 사회 정의의 실천은 하느님이 부여하신 인권을 최대로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예수 성심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개인의 신앙 고양과 개인적 덕목에 국한된다면 교회 건물이 세상에 서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무교회주의자의 지론이 옳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세상의 나쁜 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구조적 불평등은 개인의 힘으론 타파할 수가 없다. 교회 지도자가 안이하게 신자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세요, 들!” 하는 립서비스로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교회는 사회의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 기층민을 탄압하는 세력에게 예수의 성심을 당당히 알리고 깨우쳐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부당한 강도 행각을 멈추게 하는 일 또한 주교좌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것이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계명이며 성심이다. 


그 계명을 현실화하는 방법으로 각 해당 사회단체들은 연대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협약을 맺어 가난한 사람들 혹은 강도나 다름없는 권력자들과 재벌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처음처럼 되돌려 주어야 한다.  


6월은 예수 성심성월이다. 예수의 마음을 묵상하는 달이다.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그분 앞에서는 편파 편애라는 단어가 없다. 성심 성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예수 성심과 함께 예수 성심을 통하여 사랑으로 보답해서 예수님의 첫째 계명을 이행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마리아인은 지금으로 치자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외교인으로서 예수 성심을 증거하고 실천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화혁명인 촛불집회는 예수 성심의 집단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 많은 시민이 각자의 역할을 다했다. 각자의 능력 안에서 각 부분을 담당했고 아무도 자기 본분에서 엇나가지 않았다. 촛불시위를 막으려는 자들도 자신의 본분을 지켜 악의 무리를 내 모는데 일조 했다. 어느 스님은 시위자들의 함성을 염불을 외는 소리로 들었고 어느 신부님은 기도 소리로 들었다. 

   

강도나 다름없는 무자비한 재벌, 언론, 정치, 사법 권력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하여 소리를 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예수님의 성심이고 사마리아 인의 마음이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비용을 대며 자신이 올 때까지 피해자를 돌보아달라고 부탁한 것처럼 국가 시스템은 고통 받는 기층민을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 어느 가축만도 못한 국회의원이란 자가 세월호는 꺼내지 말고 가슴에 묻자고 했던가? 국가의 존재 가치를 깡그리 무시한 자가 어쩌다 국회의원이 된 건지 진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 5·18기념식에서 유가족을 안아주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출처=비디오머그 갈무리)


새 대통령은 광주 5·18기념식에서 다시는 그런 원통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 국민의 생명과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가치 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존재 가치를 훨씬 뛰어넘어 예수님의 성심이고 피해자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대통령이 되고 문재인은 바로 이러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인처럼 서슴없이 다가섰다. 본인의 말처럼 앞으로 5년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가톨릭 신자 디모테오로서도 멈추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목숨까지 강도당했던 세월호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킨 것처럼.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6-37)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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