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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74 : 잃었던 양과 은전의 비유
  • 김근수
  • 등록 2017-06-13 12:34:00
  • 수정 2017-06-14 15: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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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여러분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습니까? 5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입니다. 7 잘 들어두시오.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입니다”


8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입니다. 9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10 잘 들어두시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루카 15,1-10) 




루카 15,1-32에서 세 이야기를 통해 죄인에 대한 예수의 자비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세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구조가 비슷한 13장처럼 15장의 주제는 회개다. 잃어버린 양, 은전, 아들 이야기가 이어진다. 잃어버리고, 찾고, 함께 기뻐함이 이야기 줄거리다. 시편 23,4 또는 예레미야 31장을 보는 듯하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의 예수는 루카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스승의 모습이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 예수는 예루살렘 가는 길에서 스승으로 예루살렘에서 저항가요 혁명가로 소개된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예수 설명을 듣고 있다. 예수를 경청하는 두 그룹과 반대하는 두 그룹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다. 예수는 세리들의 식사 초대도 거절하지 않았고(루카 5,27; 15,1), 바리사이들의 식사 초대도 받아들였다(루카 7,36; 14,1). 예수는 공짜 밥을 좋아했다. 그런데 3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음식까지 나누고 있는 예수를 비난하고 있다. 죄인들과 예수의 식사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나타낸다. 세계 어느 종교도 죄인들과 식사를 자기 종교의 제일 특징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교회는 죄인들과 식사를 나누느냐 여부에서 넘어지거나 일어선다(Bovon, III/3, 21). 루카 15장은 죄인의 회개와 식사를 잘 연결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는 언급은 루카에 자주 나온다(루카 5,1; 6,18; 21,38). 민족의 앞길과 운명에 대해 말씀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주교들과 신부들에게 몰려들고 있는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루카 5,29-32; 7,36-39; 18,10). 세리들과 죄인들이란 표현은 예수를 비판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루카 5,30; 7,34). 1절에서 죄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샌더스는 죄인들을 시골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하느님 계명을 공개적으로 어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E. P. Sanders, Jesus and the Sinners, JSNT 19(1983), 5-36). 나는 샌더스 입장을 찬성하기 어렵다. 그는 어디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았을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와 죄인들의 식사를 비난하자 예수는 그에 대한 반박으로 비유 두 개를 든다. 15,1-10은 남성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여성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예레미야 31,10-14를,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예레미야 31,15-17을 떠올리게 한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마태오와 도마복음에도 나온다. 양과 은전은 일터와 가정에서 중요한 재산이다. 예수는 자영업자답게 경제적 관점에서 사람들에게 해설하고 있다. 세리들과 죄인들, 즉 당시 사회적으로 멸시 당했던 사람들이 청중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앞에서도 죄인에 대한 예수의 자비와 바리사이 사람들의 예수 비판이 있었다(루카 14,13. 21). 1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상징적 의미를 띄고 있다. 루카에게 그들은 예수를 최초로 반대한 사람들이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이다(Bovon, III/3, 20). 자선 잘하기로 유명한 바리사이들은 왜 죄인들을 무시했을까. 죄인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유다인은 생각했다. 바리사이들이 유난히 자비롭지 못하다기보다 예수가 유별나게 자비로운 분이다. 바리사이들은 상당히 자비로운 편이었다.



예수는 왜 그런 이야기를 세 번이나, 그것도 다름 아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고 있을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대체 누구던가. 모범적인 평신도에 존경받는 신학자들 아닌가. 예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신앙인의 대표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감히 훈계를 하고 있다. 오늘로 말하자면, 매일 미사에 나가는 가톨릭 신자들과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개신교 성도, 그리고 목사, 신부, 신학자들에게 예수는 “여러분은 왜 그리도 자비롭지 않습니까?” 하고 꾸짖는 것이다. 


3-7절은 루카가 예수 어록에서 발견하여 나름대로 편집하였다. 루카는 특히 다시 찾은 기쁨을 더 강조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청중 누구나 쉽게 알아듣는 소재였다. 루카는 잃어버린 양을 들판에서 찾는 데 비해, 마태오는 산(마태오 18,12)에서 찾는다. 도시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시도했던 루카였다.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마태오 13,44-46; 루카 13,18-21; 14,28-32). 들판에 그대로 놓여진 99마리 양은 잃은 양 한 마리처럼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 99마리 양이나 잃은 양 한 마리 모두 공동 운명이다. 이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망각하고 있다. 잃어버린 동료 양에 관심 없는 양이나 목자는 하느님께 얼마나 혼이 날까.   


양을 어깨(이사야 40,11)에 메고 기쁨을 나타낸다. 양을 어깨에 멘 목자에게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보인다(에제키엘 18,23; 34,16). 루카복음에서 기쁨은 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도 기뻐하시는 것이다.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하고 있다. 다시 찾은 양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친구들과 이웃들이 어떻게 기뻐했는지 루카가 소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쉽다. 


잃은 양이 죄인인 것은 아니고,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회개한 것도 아니다. 잃은 양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거나 잃은 양이 취해야할 적절한 태도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를 칭찬하는 것이다. 99:1은 반드시 경제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까짓 한 마리 포기해도 99마리가 있지 않는가. 그러나 종교인은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 한 마리를 잃으면 남은 99마리를 잃는 것과 같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은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을 주여 어여삐 여기시고 축복하소서. 가출한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행방불명인 어린이들과 성인들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8절에서 여인은 재산의 1/10을 잃었다. 은전drachme는 그리스 은전으로 신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마태오 17,24에 성전세로 은전 두 닢didrachmon이 언급되었다. 은전 100닢이 1미나mna(루카 19,13), 은전 6,000은 1달란트talanton에(마태오 18,24) 해당한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책에 따르면, 체사레아 바닷가에서 1.1리터 올리브기름이 은전 한 닢에 팔렸다고 한다(Wolter, 527). 은전drachme 가치는 시대마다 지방마다 달랐던 것 같다. 은전 한 닢의 정확한 구매력을 우리가 알긴 어렵지만, 큰돈이 아님은 분명하다. 8절에서 여인은 재산의 1/10을 잃었다. 여인은 가난했다. 은전을 다시 찾은 가난한 여인은 목숨을 다시 찾은 것처럼 기쁘다. 그 가치 적은 은전이 가난한 여인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다. 여성 노숙인이 떠오른다. 부자들은 여인의 이 심정을 알까? 


목자는 100마리 양떼 중에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잃은 재산 1%를 찾아 나섰다. 여인은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었다. 잃은 재산 1/10을 찾는 것이다. 남자 재산이 여자 재산보다 10배나 많다는 당시 현실을 암시한 것일까. 재산을 잃은 충격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크다는 말일까. 100마리 양떼를 가진 남자는 부자다. 은전 10닢을 가진 여자는 가난하다. 내가 보기에, 예수는 재산에 있어 남녀 불평등 문제를 복선으로 깔고 있는 것 같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설교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그러나 잃었던 은전의 비유는 그에 비해 드물게 연구되었고 설교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신학과 설교를 남자들이 독점해온 역사가 남긴 아픔이다. 어서 고쳐야 하겠다. 


▲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는 여인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루카는 이미 회개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망설이고 애가 탔을까. 고백성사에 오는 신자들의 마음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일화 하나 생각난다. 고백성사를 보고 보속을 기다리는 신자에게 비안네 신부는 평안히 돌아가라고 말했다. 고백성사에 오기 위해 고뇌하고 번민한 그 마음으로도 이미 보속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지만 예수를 알고 싶어 하고 예수에게 배우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이미 예수 가까이에 있다. 그들은 벌써 이름 없는, 그러나 사실상 신자 아닌가. 


자비로운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를 보며 우리 뭐 느끼는 게 없는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가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은가. 교황 방한 이후에도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신부들은 여전히 많다. 2016년 5월 영화 ‘프란치스코’가 전국 180여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과 그 삶을 잘 그린 작품이었다. 개봉 한 달 만에 3만 명의 관객도 기록하지 못하는 흥행 참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교구나 본당에서 이 영화를 홍보하거나 단체로 관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철저한 외면과 냉대 속에 영화 ‘프란치스코’는 잊혀졌다. 영화뿐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과 행동을 언급하지도 않는 신부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 (사진출처=L`Osservatore Romano)


루카는 본문에서 세 가지를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다. 1. 예수는 죄인들에게 자비롭다. 2. 우리도 예수처럼 죄인들에게 너그럽게 다가서야 한다. 3. 교회 안에서 회개한 동료들을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맞아들여야 한다. 죄인의 회개를 강조하지만 회개한 죄인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 부족한 교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루카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이방인도 생각하고 있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자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목자에게 양 냄새가 나야 한다고 말했다. 목자는 양과 자주 접촉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목자에게서 목자에게 양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목자가 양이 아니라 늑대와 자주 접촉한다면 어떻게 될까.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에 나가 연설한 서울대교구 여형구 신부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조중동을 통해 세상을 보고, 중립과 화해를 내세우며 침묵으로 촛불집회를 방관했던 주교, 사제, 수녀들에게 하는 말이다. 신자들을 올바로 이끌지 못하는 목자는 양의 목숨을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늑대에게 양의 목숨을 팔아넘기는 도둑이다. 착한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목자도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였다. 예수처럼 착한 목자는 비교적 안전한 상태의 양들을 놓아두고 잃은 양을 먼저 찾는다. 착한 목자는 성당을 찾아온 신자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성당 밖으로 나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잃었던 양을 아예 신경 쓰지도 않는 목자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잃었던 양은 한 마리가 아니라 벌써 99마리나 되었다. 잃었던 양 99마리를 팽개치고 한 마리 양과 재미있게 어울리는 목자는 더 이상 목자가 아니다. 목자는 양떼 곁에 있어야지 왜 골프장에 있는가. 십자가를 지라고 했는데 왜 골프채를 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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