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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위반혐의자를 위한 위험한 증언…왜 하세요?
  • 신성국 / 염은경
  • 등록 2017-06-15 21:25:11
  • 수정 2017-06-16 19: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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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법정 증인석에 앉아 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위험한 증언을 이어온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이재봉 교수. 


6.15남북공동합의 이후 17년, 그에게 ‘북한’이란 어떤 의미이며 왜 ‘통일운동’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이 정부에서 통일의 희망을 발견하는지 물어봤다. 



▲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이재봉 교수 ⓒ 곽찬


(신성국 신부)「이재봉의 법정 증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시각이 훨씬 넓어지는 계기가 됐고요. 우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안됐는데 남북문제에 있어서 정권교체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재봉 교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합쳐서 9년 동안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저는 남한에서 북한의 붕괴를 추구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라면 한마디로 ‘비핵개방3000’이 있습니다. 핵무기를 포기하고 개방한다면 북한국민 GDP를 3천 달러까지 올려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건을 붙여 ‘핵무기를 포기하면 해 주겠다’는 것인데, 포기하도록 대화를 이끌지 않고 먼저 포기를 해야만 대화와 협력 교류를 해나간다는 말이었던 것이죠.


박근혜 정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통일대박’이란 말이 유행했어요. 물론 통일하면 대박이 날 겁니다. 역시 조건이 문제에요. 북한이 왜 핵무기, 미사일 개발에 집착 하는가를 파악해서 핵무기와 미사일에 매달리지 않고 우리와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조건을 그렇게 붙이니까 남북관계 진전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만 실질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북한체제의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과거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을 이어받았던 노무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남북관계를 진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2000년 1차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6·15합의사항, 2007년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나온 이른바 10·4선언을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큽니다.


‘민주화의 죄인’인 나는 하필, 김일성이 사망하던 해 귀국해 시간강사를 시작했다.


(신성국 신부) 교수님께서 본래 미국에서 공부하실 때 전공은 미국정치와 국제관계, 평화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한 갈퉁의 저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도 번역하셨는데 한국에서 주로 강연하거나 활동하는 주제는 ‘통일’과 ‘북한’입니다. 이 분야에 관심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 (사진출처=이재봉 교수 SNS)


(이재봉 교수) 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미국에서 10년 정도 공부하고 1994년도에 귀국했습니다. 시간강사를 1년 반 했는데 시작할 때 처음 맡게 된 과목이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이었습니다. 


1994년도 8월에 귀국해서 9월에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 해 7월, 김일성이 사망했습니다.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북한 체제가 붕괴될 것이란 믿음이 확산된 거죠. 아직까지도 북한 붕괴론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만, 처음 북한붕괴론이 제기 됐던 것이 1980년대 말 90년대 초입니다. 동유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북한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훨씬 안정된 동독이 무너지는데 북한이 온전하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건 평가는 엇갈립니다. 하지만 ‘50년 간 통치를 해온 사람이 죽었으니 북한체제가 무너지고 곧 통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북한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에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이 생겼습니다. 이 과목이 자꾸 증설되다보니 담당교수를 찾기 어려웠죠. 전혀 공부하지 못한 저한테도 맡기는데 당시 시간강사인 제가 별 수 있었겠습니까? 공부를 시작했죠. 


학교, 도서관, 책방을 다니면서 개학까지 일주일정도 밖에 안 남았으니까 북한 관련 책을 끌어 모아서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공부를 하고 첫 강의를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학생들한테 제안을 했어요. ‘나는 북한 전문가가 아니다, 나는 여러분을 통해 공부하고 여러분은 나를 통해 공부하는 과목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그 후로 과목이 인기를 끌고 300명, 500명씩 수강생이 몰려들면서 어느새 그것이 제 전공이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20년이 넘었습니다. 매학기 두세 강좌씩 맡으면서 실제 제가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미국정치, 한미관계는 부전공처럼 되고 북한정치, 통일문제가 전공처럼 됐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을 공부하면서 역사가 많이 왜곡됐다는 것을 느꼈고,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부끄러운 과거입니다만 저는 상업고등학교 졸업생으로 대학에 5년 정도 늦게 들어갔습니다. 1979년에 1학년으로 들어갔는데 박정희가 죽었을 때입니다. 소위 ‘서울의 봄’이라고 1980년 3월, 민주화 데모가 일어나지 않으면 하루해가 저물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때 정치학을 공부하고 정치외교학과 학생 대표도 맡았지만 데모를 주동하기는커녕 단순 참가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집안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말로 너무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데모할 때 도서관, 연구실에 처박혀 공부를 해 교수가 되긴 했지만, 제가 즐겨 쓰는 말로 ‘민주화의 죄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남한에서 가장 큰 목표는 평화통일이 되겠다는 생각에 과거 민주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 대신 늙어 죽을 때까지 평화통일 문제에 조금이라도 힘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해왔습니다. 


나는 이석기 의원도 잘 모르고, 그를 위해 증언 한 것이 아니었다.


▲ ⓒ 곽찬


(신성국 신부) 개인의 역사, 경험 속에서 통일 문제와 역사 문제를 말씀해주시니 그야말로 실감이 납니다. 종교적으로 생각의 전환을 ‘회개’라고 하는데 교수님은 정말 회개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봉 교수) 강의를 맡은 것이 제가 북한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 계기라면, 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다른 데 있습니다. 1994년도에 김일성이 죽고 95년도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전 세계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100년 만에 대홍수를 겪으면서 식량난이 악화됐죠. 그 무렵 한겨레신문이 홍보를 하기 시작해서 북한동포 돕기 운동이 펼쳐집니다. 


그 무렵 「월간통일한국」이라는 잡지에서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북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글을 써달라는 거예요. ‘아니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찬성한다. 북한 사람이든 아니든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찬성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잡지를 받아보니 저는 찬성한다는 주장을 하고 그 당시 통일부 관계자가 반대한다는 주장을 편 거예요. 


대북식량지원에 대해서 찬반논쟁을 붙인 거죠. 그런데 그때 제 글 내용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통일운동 단체에서 대북식량지원에 대한 글 잘 봤다면서 강의요청을 해왔고 그때부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월간지에 글 한 편 실으면서 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되고, ‘북한사회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 하나 맡으면서 북한을 깊이 공부하게 되니 인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신성국 신부) 제가 이번 인터뷰를 위해 「이재봉의 법정 증언」이란 책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나름 사회참여형 성직자로서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한반도 문제나 통일정책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거나 모르고 있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통일 관련된 책을 보면 보통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교수님 책은 정말 쉽게 읽혔습니다. 책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십니까?


(이재봉 교수) 제 책을 극찬해주셨는데 덕분에 쉽게 썼다는 자랑을 조금 하고 싶습니다. 제가 글을 쉽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공부를 깊이 못했습니다. 어려운 것을 모릅니다. 어려운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 쓸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제 글의 첫 독자는 제 아내입니다. 아내도 이해를 못키시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겠느냐는 생각이 있습니다. 제 아내는 우리나라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입니다. 영어는 저보다 잘 할지 모르겠지만 한자에 서툴고 어려운 한국말을 모르죠. 그래서 어려운 한자말은 우리말로 고쳐야 하고 아내가 이해하기 쉽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고쳐 쓰게 됩니다. 


책 머리글에도 밝혔지만 제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는 사람들을 위해 증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글이 알려지다 보니 국보법 전문 변호사들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십여 차례정도 법정에 섰는데 결정적인 사건이 2014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항소심에서의 증언입니다. 항소심 재판장에 방청객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제가 증언을 마치고 다음날 제주도에 가서 강연을 하는데 미국에 있는 처남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신문이 떠들썩하냐며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인터넷 신문을 찾아보니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제가 증언한 것을 두고 크게 시비를 걸고 있었어요. 친북, 종북 학자라는 거죠. 


저는 이석기 의원도 잘 모르고 피고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사회에 대해서 잘못 알려지는 것, 편견과 왜곡은 배제해야 재판관이 공정하게 판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법정에 섰죠. 그런데 당시 한나라당, 현재 자유한국당에서 매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정치인들하고 대놓고 토론할 수도 없는 문제였고, 이럴 바에 글을 써보자 해서 < 프레시안 >에 글을 연재 하게 됐습니다. 


(신성국 신부) 교수님은 옛날에 학생운동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셨다면서 시대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이석기 의원 사건에 뛰어드셨습니다. 학자들은 그런 증언이나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교수님의 용기가 놀랍습니다. 


(이재봉 교수) 솔직히 말해서 기꺼이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주저하고 있는데 담당 변호사들이 와서 ‘당신이 지금까지 증언한 걸 지켜보면 가장 적임자 같다’고 하는 겁니다. 변호사들과의 인연 때문에 서게 됐죠. 또, 이석기 의원이 유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간에 정당 해산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건인가 생각하고 ‘북한 관련한 편견을 깨뜨려야 한다. 이건 비민주적이다’라는 생각으로 섰던 것입니다. 


저는 상당히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아내가 다른 뒷바라지는 다 하겠는데 ‘옥바라지’는 못하겠다고 통일운동에 대해서 상당히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증언하는데 아내가 따라와 봤어요. 부산에서 재판하는데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몸서리 쳐진다고 다신 따라오지 않습니다. 저도 항상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 원인은 우리 내부에 있다.


▲ ⓒ 최진


(신성국 신부) 교수님께서는 ‘통일을 왜 이루지 못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대체 왜 통일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이재봉 교수) 책을 통해 언급한 내용 가운데 우선 ‘전쟁과 분단에 대한 적대감’이 중요하긴 한데 결정적이진 않습니다. 서두에 제가 평화의 창시자 요한 갈퉁의 저서를 번역했다고 소개 하셨는데 요한 갈퉁 교수가 제기한 재밌는 이론이 있어요. ‘T+40’이론인데 ‘T’는 요즘 많이 쓰는 ‘트라우마’ 커다란 심적 충격을 얘기합니다. 아무리 심각하고 커다란 충격, 상흔이라고 할지라도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고 한 세대에 10년을 덧붙여서 40년이면 풀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죠. 세계역사상 전쟁을 치룬 당사자들이 모두 40년이 지나기 이전에는 화해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북사회는 예외였습니다. 40년이 훨씬 넘지 않았습니까?


다음으로 주변 환경, 특히 외세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저희 내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거나 또는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걸 바로 친일파라고 보는 겁니다. 분단 상태가 지속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들, 이 세력이 크고 강하기 때문에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친일세력이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미군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가장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미군정이 말 그대로 미군들이 정치를 한 것 아닙니까? 전혀 준비가 안 됐는데 군인들이 뭘 알았겠어요. 한반도에 대해 잘 모르는 군인들이 통치를 하는데 행정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았을 것 아닙니까. 


▲ (사진출처=뉴스타파)


그 당시 우리는 겨우 일본식민통치에서 벗어났는데 행정경험을 한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대부분 친일파였죠. 그 사람들이 배척을 받기는커녕 권력을 다시 잡게 된 거죠. 그게 이승만 정부로 이어졌죠. 또 ‘친일’이라는 허물을 벗어 던지기에는 ‘반공’만큼 좋은 게 없었죠. 더군다나 전쟁을 거쳤기 때문에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데에는 어떤 허물도 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 과정을 통해 친일파 집권이 계속되고 반공은 더욱더 강화되고 통일은 멀어졌던 것입니다. 


(신성국 신부) 한반도의 불행이 중첩돼 있네요. 이념, 미군정, 친일파, 반공주의로 이어지면서 6·25한국전쟁 일어나고 세계에서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가 드물지 않을까요?


(이재봉 교수)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이렇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동아시아로 확산될 때, 당시 공산주의라 하면 얼마나 신선한 사상이었겠어요. 지금 우리가 한국전쟁 거치면서 치가 떨리는 사상으로 받아들이지만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라 하면 신선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회에 자본가 계층도 생기고, 중산층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는 노동자, 농민이 소위 ‘인민’의 80%였죠. 당시 지주들 대부분은 친일파였습니다. 이 사람들 빼고 70~80% 이상의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선호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억지로 반공을 하니 친일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정권을 잡았고 반공은 더욱 굳어진 것이죠. 정권획득의 유리한 수단으로 악용된 것입니다. 


▲ (사진출처=국가기록원)


(기자) 말씀하신 것처럼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반대 세력이 있는데, 동시에 통일에 무관심하도록 만드는 세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과 언론의 역할이 이 부분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재봉 교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신문들이 대부분 ‘극우’ 아닙니까? 친일과도 연결이 되고요. 이들이 우리사회 기득권 계층 중 핵심이라 할 수 있죠. 친일했던 사람들이 허물을 벗고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반공을 이용했는데 언론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요즘도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겠죠. 분단이 강화돼야 기득권을 계속 유지, 강화할 수 있는 것이고요. 이러한 극우보수 언론도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집단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경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3포, 5포 세대라는 말이 나오는데 졸업해도 취업하기 어렵고, 취업해도 비정규직으로 먹고살기 쉽지 않고, 결혼도 포기하게 되고 그런 문제에 놓인 사람들이 통일에 관심을 갖기는 힘듭니다. 이런 것이 통일문제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또 하나, 통일을 이야기할 때 북한체제가 없어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흡수통일’이란 말은 안 하지만 궁극적으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가 확산되는 것을 꿈꾸는 것이죠. 아무리 ‘친북’적이라거나 북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사회주의 체제로 통일된다든지 체제가 공존하는 꿈은 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북한체제가 무너지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죠. 60~70년 분단을 해왔는데 저쪽 사람을 껴안으려면 얼마나 큰 혼란이 있겠는가, ‘통일경비’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2, 13위 경제 대국인데 북한은 뒤에서 12, 13위죠. 우리가 북한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나도 직장생활하며 먹고살기 힘든데 저 사람들 위해서 세금까지 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회혼란과 막대한 통일경비라는 문제 때문에 젊은이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거죠.


(신성국 신부)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부터 남북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심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재봉 교수)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는 통일교육 정책이 ‘평화’ 쪽으로 많이 기울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평화통일 교육대신 안보교육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 통일부는 없었다고 봐야겠죠. 국방부 따라가기에 바쁘고 개성공단 폐쇄에도 장단을 맞추고 군사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이중성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나왔고 장관 후보들 인사청문회에서도 언급됐던 것처럼 ‘북한이 주적이냐,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북한은 한편으로는 대치하고 있는 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할 동포입니다. 그러면 국방부에서 주적으로 삼더라도 통일부에서는 형제동포로 삼고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전 통일부는 국방부를 따라가기 바빴던 것이죠. 그러니까 대통령은 국방부만 통솔하는 게 아니라 통일부도 관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적이고 한편으로는 형제동포인데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 2부에서 본격적으로, 통일의 필요성과 통일경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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