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김근수) 가난한 예수 75 : 잃었던 아들
  • 김근수
  • 등록 2017-06-20 11:21:50

기사수정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습니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습니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습니다” (루카 15,11-32)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엠마우스 이야기와 함께 루카 3대 비유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Bovon, III/3, 19). 4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비유 중에 가장 아름다운 비유라고 일컬어진다.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례, 그림과 문학에서도 많이 다루었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행복한 고민이 생기는 이야기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수도원에 입회하는 의식에서 잃었던 아들의 비유가 읽혀진다(Bovon, III/3, 65). 예레미야 31,10-14와 연결되는 이야기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호세아 11,8-9)을 흠뻑 느끼고, 죄인과 함께 식사한 역사의 예수를 알아보는 이야기다.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극중 인물이 되어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받아들이는 하느님 사랑에 젖어 기뻐할 이야기다.


주인은 토지와 농장과 일꾼을 소유한 부자다. 주인의 아내와 딸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작은 아들 나이는 17-22세로 짐작된다. 유산을 생전에 미리 달라고 청한 것(창세기 25,5-6)이 비난받지는 않았다.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비판받았다. 작은 아들이 집에 있었다면 유산은 아버지 죽음 뒤에 받았을 것이다(신명기 21,17). 작은 아들이 양이나 은전과 달리 그냥 실종된 것은 물론 아니다.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행동했다. 자유 의지를 사용하지 못한 채 강제로 실종된 성인 실종자가 한국에도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14절에서 흉년까지 들어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고대 사람들은 흉년의 고통을 쉽게 잊지 못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먹을 것을 사지 못한 상태다. 흉년 같은 자연 재해가 아니라 낭비로 인한 경제 문제였다. 어떤 사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것, 농장에서 돼지를 치게 된 것은 작은 아들의 곤궁한 처지만 나타낸 것이 아니다. 돼지 농장 소유주는 분명 유다인이 아니다. 더부살이misthioi는 날품팔이가 아니라 비교적 장기간 숙식을 제공하는 노동계약paramone을 가리킨다. 추락한 신분과 노예계약이 떠오른다.


16절에서 돼지와 생존경쟁을 놓고 다투는 작은 아들의 비참한 신세가 소개되고 있다. 쥐엄나무keratia는 키가 10-25센티미터, 두께가 약 3센티미터 정도다. 그 열매는 처음에는 단단하지 않고 달지만 차차 굳어져 짐승 먹이로만 사용되었다(Wolter, 533). 사람들은 채소 토막, 올리브 찌꺼기, 포도 찌꺼기 등에 풀을 섞어 돼지 먹이로 주었다. 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제주 해녀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불결한 돼지(레위 11,7)를 기른 사실은 그가 조상 대대로 종교인 유다교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을죄에 해당한다. 17-19절에서 작은 아들의 독백이 나온다. 루카는 독백이란 문학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작은 아들은 두 가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결심했다. 아버지 농장에서 일하는 하인들에 비해 자신의 처지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배고픔이 사람을 회개시키기도 하는가. 이방인을 떠나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19절 부르다kalo는 있다를 뜻하기도 한다. 아버지를 호칭하는 것은 아버지 존재를 찾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회개가 아닌 복귀(H. Merklein, Die Gottesherrschaft als Handlungsprinzip, 195)로 설명하는 것은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아들 권리도 이미 잃었음을 알고 날품팔이로 써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회개가 아닌 복귀로 설명하는 것은 찬성하기 어렵다.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멀리서 보았다. 집안에 불쑥 들어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갑자기 마주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을 기다리느라 멀리 사방을 수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여인들아, 아빠의 사랑도 있다.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루카 7,13; 10,33)이 들었다. 작은 아들에게 달려갔다. 중동 지역에서 가장이 죄 지은 사람에게 달려가는 일은 흔한 일이 전혀 아니다(Kremer, 159). 돼지를 길러 종교적으로 불결해진 작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창세기 46, 29; 토비트 11,9: 사도행전 20,37) 입을 맞추었다. 키스가 용서의 표시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들은 자기 죄를 아버지에게 고백했다. 아버지가 먼저 용서했고 아들이 그 후에 고백했다.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한 후에 아버지가 비로소 아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아들의 고백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도 없이 아버지는 잔치를 준비시킨다. 이미 용서한 것이다. 포옹과 키스로 충분하다. 22절 어서prote에는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좋은 뜻이 있다. 훈계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라고 부탁한다. 반지는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다. 아들의 권리가 복구된 것이다. 이집트 파라오는 요셉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창세기 41,42). 가톨릭 주교들이 끼는 반지는 권력의 상징이다. 그런 거 이제 없애면 어떨까. 대가족 사회인 당시 문화에서, 작은 아들의 가출 후 아버지는 동네에 작은 아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선언이나 행사를 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복권을 잔치를 통해 공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작은 아들은 죄를 지어 죽은 처지였지만, 아버지가 받아들여 다시 살아났다. 양이나 은전처럼 잃었지만, 다시 찾았다.


25절에서 아직까지 언급되지 않던 큰 아들은 들판에서 일하다가 돌아왔다. 큰 아들이 노동을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큰아들은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집안에 들어올 때까지 아버지가 기다린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을 혼낸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나와 큰아들을 달랬다. 31절에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얘야teknon라고 부른다. 두 이유로 큰아들을 설득하고 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기쁨을 계속 누리고 있었다. 아버지 것은 모두 큰아들 것이다. 큰아들이 유일하게 불쾌한 것은 아버지가 베푼 잔치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새로운 유산 분배는 아니었다.


30절에서 큰아들은 “창녀들한테 빠져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독자들은 다 알지만, 큰아들은 동생의 자세한 소식을 아직 모르지 않는가.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직접 갈등을 빚은 일은 없다. 카인과 아벨(창세기 4,1-16), 야곱과 에사우(창세기 33, 1-20) 이야기와는 다르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극진히 사랑했다. 아버지는 충실한 큰아들도 사랑했고, 돌아온 작은 아들도 사랑했다. 세상의 모든 아빠는 비유에 등장한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주인이란 단어를 하느님, 예수, 교회,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 보아도 좋겠다. 4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비유 중에 가장 아름다운 비유라고 일컬어진다. 하느님은 서둘러 용서해주시지만, 인간은 용서를 청하기에 게으르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있다. 교회는 아버지처럼 죄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가? 어머니로 즐겨 비유되는 교회는 아버지보다 더 빨리 더 기쁘게 죄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가?



본문에서 여러 생각이 이어진다. 여러 그룹으로 나뉜 그리스도교를 연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 같다. 아버지 사랑을 두고 경쟁하는 형제의 모습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여성은 본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마치 빈 공간처럼,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 여성 현실을 느끼는 것 같다. 아버지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모습에서 민주주의 원칙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리스도교 현실이 아프게 드러나는 것 같다.


잃었던 딸의 비유는 복음서에 왜 없을까. 잃었던 딸도 많지 않은가. 난민, 성매매 여성, 인신 매매, 납치, 전쟁 등으로 강제로 잃은 딸들이 역사에도 오늘도 많다. 여인들아, 아빠의 사랑도 있다. 아빠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여인은 희망이 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된다. 아빠는 딸을 기다리고 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호세아 11,8-9)을 흠뻑 느끼고, 죄인과 함께 식사한 역사의 예수를 알아보는 이야기다.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극중 인물이 되어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받아들이는 하느님 사랑에 젖어 기뻐하게 될 것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