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미사 강론
2014년 8월 16일, 124위의 순교자들이 복자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분들을 기념하는 미사를 처음으로 봉헌한다. 지난 해 8월 16일, 백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교황님을 직접 보기 위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우리 복산 성당에서도 150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시복식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8월 15일 밤 11시부터 본당 소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정확히 16일 0시에 울산을 출발해, 새벽 5시가 조금 못 된 무렵부터 광화문 광장에 들어가서 시복식 미사를 기다렸다.
드디어 교황님께서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셨을 때에, « 비바 빠빠 (viva papa) »를 외치면서 교황님을 환영했다. 카 퍼레이드를 하실 때에, 어린아이들을 손수 축복해주시고,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만나서 그들의 손을 꼬옥 잡아 주시고, 그들을 그윽한 눈길로 위로해 주셨다.
그 장면을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었다. 그날, 세월호와 관련해서 한마디의 말씀도 없었지만, 이미 교황께서는 당신의 행보 자체로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영역의 것까지도 다 아우르셨다. 교황께서는 신자뿐 아니라,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2천년 전 예수의 모습을 재현해 보여 주셨다.
미사 강론 때에, 교황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강론을 통해 신앙인들의 사명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 경천애인의 길 »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셨다. 특히 한국의 순교자들의 삶을 오늘날에도 계승할 것을 요청하셨다.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순교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불의에 목숨으로 항거하고,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며,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살았던 과거의 순교자들을 본받아, 지금의 우리 세대에서도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신앙을 위해 바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초대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신약성경의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여러 서간에서 얼핏 얼핏 드러나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초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참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 구성원들끼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2-45 참조).
초대 교회 안에는 왕도 귀족도 노예도 종도 없었고, 오직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만 존재했었다(갈라 5, 13 참조). 초대 한국 교회 역시 그러했다. 영세 받은 사람들끼리는 왕후장상과 양반 상놈이 없었다.
저 지체 높으신 양반님네들도 최하층 사람들에게 하대가 아닌 존대를 했었고, 이름조차 없던 개똥이, 소똥이도 요셉 형제, 마리아 자매라고 불렸다.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양반님네들과 밥상을 같이 했었고, 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었다.
양반님네들도 불가촉천민들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라, 천주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 그들도 자신들과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농공상과 신분제도를 국법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에 영세 받고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었다. 거기에다 천주님을 믿다가 죽으면 하느님 나라로 가서 영복을 누린다는 교리까지 받았다.
초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양반 쌍놈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 바로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이미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천주교인이라고 붙잡혀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을 때에도, 천주님을 믿고 죽으면 영복을 받으니까, 지금 겪는 힘듦을 조금만 참아내면,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그 믿음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한 순교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죽어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구원이 되고 안 되고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내가 살아있으면서 겪게 되는 숱한 문제들, 숱한 죄와 숱한 고통들, 이리 살고 싶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대단히 모순된 현실들에 대해 하느님의 뜻을 묻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희망에 우리의 마음과 몸을 내어 맡기는 것이 신앙이고, 그 신앙을 삶으로 살아갈 때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다름아닌 거룩함이다.
우리들 신앙인은 모두다 성인성녀 후보자들이다. 세상에 나면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다. 원치 않으나 아프고, 원치 않으나 실패하며 원치 않으나 가난하기도 한다. 원하는 것은 되지 않고 원치 않는 것들이 언제나 먼저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런 때에,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태도가 곧 신앙이 출발하는 자리이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리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를 대단히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 바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앙이며, 죽어서보다는 오히려 지금 살아서 더 신비롭고, 더 충만한 삶을 살게 해주는 비결이 바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의 삶을 살아 간다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당신들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있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