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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10-1 : 종교와 국가, 그 교묘한 결합
  • 이찬수
  • 등록 2017-10-23 16:13:32
  • 수정 2017-10-30 12: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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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섯 명의 참석자가 원음방송 신개벽포럼과 공동으로 레페스포럼을 진행했다. 이번 포럼에서는 종교와 국가가 교묘하게 결합되는 지점에 대해 냉철하게 비판하고, 그 극복 가능성 및 대안에 대해 모색했다. 



참석자 :

서보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제정치학)

원익선(원광대 정역원 연구교수, 일본불교학)

이병두(종교평화연구원장, 불교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포럼의 취지 및 토론자들


이찬수: 한국인의 절반 정도는 종교인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개인과 사회 평화를 추구하지만, 종교인이 그렇게 많아도 사회는 평화롭지 않습니다. 도리어 종교인들 간 입장이 달라서 갈등도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평화는커녕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비난도 듣고 있지요. 오늘 정말 우리 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은 무엇인지,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종교가 평화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더 폭력적인지 이런 얘기들을 여러 선생님들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원음방송 TV 신개벽포럼과 함께 합니다. 시청자를 위해서 저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이찬수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주관기구인 ‘레페스포럼’에 좀 더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사람 중 하나구요, 개인적으로는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평화인문학을 정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익선: 반갑습니다. 원광대 정역원에서 일하고 있는 원익선입니다. 저는 일본불교를 전공하고 있고, 최근에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와 국가 간의 문제 그리고 원불교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가라는 것의 한계가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할 국가가 갈수록 비인간적, 비도덕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또 종교는 평화를 기반으로 한 사랑, 은혜, 자비라는 공통 가치가 있지만, 서로 연대가 안 되고 있어서 고민입니다. 그래서 국가와 종교의 폭력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서보혁: 안녕하십니까. 서보혁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근무하고 있고요, 국제정치학을 하면서 한반도의 평화 및 통일, 그리고 전통적인 안보문제를 평화학적인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불교 교도는 아니지만은 원불교가 한국의 토착불교이고, 최근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일구어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정주진: 안녕하세요. 저는 정주진입니다. 평화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뒤, 평화와 갈등해결의 문제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갈등연구소라는 일인연구소를 세워 활동하고 있고요, 개신교 신자입니다.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기독교가 평화로운지 고민을 하면서, 기독교 신자라는 정체성과 평화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일반사회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TV방송도 겸하는 토론이니 얼마나 자연스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이병두: 안녕하세요. 저는 이병두입니다. 현재 종교평화연구원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종교칼럼니스트로 활동합니다. 본래는 불교계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칼럼을 써오다가, 어떤 기회에 공무원이 되어서 5년 동안 문화체육관광부의 종무실에서 불교 업무를 담당하는 종무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종교가 정말 종교 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공부도 하면서 또 제 이야기를 많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키워드 : 국가, 종교, 평화, 폭력


이찬수: 오늘 대화의 키워드는 국가, 종교, 평화, 폭력입니다.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이런 거죠. 첫째는 종교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종교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일상에서 살지만, 일상 너머 혹은 그 근원에 대해 고민을 하기도 해요. 그러다가 사는 게 이게 다가 아니지, 뭔가 있겠지 느끼기도 하고, 그 이후로 세계가 달라지기도 하구요. 종교에는 내적 체험의 세계가 있는데,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언어적 표현을 들으며 거기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일종의 공동체가 되잖아요. 공동체가 되면 조직의 유지를 위해 서로간의 약속이 필요해집니다. 우리 이렇게 의례를 하자, 스승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따라보자, 그러면서 조직이 생기고 또 견고해집니다. 조직에는 저마다 역할이 있는데 역할이 큰 사람에게 권위가 부여되기도 하고, 권위가 권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권력은 자기정당화를 위해 조직의 유지를 강조하곤 하죠. 그런 일이 통할수록 조직 자체가 중시되면서, 관례 밖의 행동을 하게 되면 ‘이단’처럼 여기기도 하죠. 조직이나 제도가 강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내면을 조직이나 제도에 맞추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조직이나 제도 자체가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런 이들은 선교도 배타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다시 묻게 돼요. 남을 무시하는 배타적인 선교 행위가 종교인가라는…


▲ (사진출처=한겨레 휴심정)


둘째, 종교라는 순수한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인도 국가라는 틀 안에서 비종교인과 더불어 살게 되어있고, 누구나 따라야 하는 헌법이 있고, 시민의식이나 정신이 있고, 특정 지역 혹은 국가에 두루 통하는 문화라는 것도 있고요. 순수한 종교현상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여러 사람, 여러 일들이 뒤섞여 있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도 특정 종교 편을 들 수도 없고, 남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마당에 특정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보편적인 진리를 따르는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국경을 마음대로 넘어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교황이든, 달라이 라마든,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고, 그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마당에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먼저 의견을 조율해가면 좋겠어요. 원익선 교무님께서 마이크를 이어 받아주시면 어떨까요.


국가와 종교의 관계


원익선: 국제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국가는 근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영토랄까 민중이랄까. 하나의 문화라는 형식 안에 공통 이념으로 묶어서 근대국민국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도 이 점을 인정을 하고 있거든요. 우리 개개인은 전 국토를 일일이 둘러보지 않고도 국가를 승인합니다. 일종의 이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도 상상의 공동체이죠. 


특히 최근에 「사피엔스」를 지은 유발 하라리도 전 세계에 걸쳐 유통되는 화폐로부터 시작해서 공통의 관념인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물리치고 인류를 정복하게 된 유일한 전략으로서의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아시다시피 근년에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서 해일이 밀려오고 후쿠시마 원전이 파괴되어 수만 명의 사상자는 물론 수십 만 명의 이재민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원전을 만들 때는 어떤 지진에도 안전하다고 해놓고,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니까 진도 7.5 이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국가기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일본의 종교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국가를 믿었는데, 이처럼 국민을 속이는 국가는 과연 영속적으로 믿을만한 대상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국가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을 고민하는 움직임과 함께 종교인들이 모여서 국가의 한계를 스스로 메우면서도 나름대로 국가 내에서 종교의 새로운 역할을 모색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국가와 종교는 넓은 의미에서는 상보적인 관계 내지는 서로 의지해 가면서도 뭔가 각자의 역할분담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특히 촛불 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역할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찬수: 흔히 국가라고 하면 세 요소, 즉 영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영토가 있어야 하고, 거기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 즉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모든 이가 정치적 주권을 똑같이 행사할 수는 없으니까 특정인에게 위임해서 대신 정치하도록 하는 일종의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주권을 외적으로 행사하는 과정상에 무슨 차이가 있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인은 마치 자신에게는 특별한 신적 주권이 더 있는 것처럼 내세우면서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원리를 무너뜨리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번 토론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로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병두: 좀 전에 원 교무님께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둘러싼 국가기능의 한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국가기능의 한계라기보다 인간지능의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지성일 수도 있을 것이고요. 모든 것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고, 그 한계에 종교도 포함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찬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 종교와 비종교인 관계가 어떻게 보면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가령 새로운 총리가 취임하고 나면 주요 종교 몇 곳의 수장들을 찾아가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비종교인이 보기엔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죠. “뭐 특별하게 다른 것이 있어서 저기를 찾아가는가?” 한다는 것이죠. 과거 신정정치 시절의 사제를 찾아가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그 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옳다고 할 수 없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었으면 좋겠고 시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구조적 폭력과 종교


정주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도 말을 했었는데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의 담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국가 폭력과 종교를 풀어서 이야기를 해보면 폭력과 힘은 권력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폭력이라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 가하는 것이고, 폭력의 피해를 입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구조적인 폭력인데, 그 중에서도 정부의 체계와 그것의 적용이 구조적 폭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구조적 폭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힘을 누군가 독점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독점한다는 것은 곧 자원을 독점한다는 것이 되거든요. 한정된 자원을 힘을 가진 사람이 독점하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은 자원을 조금 밖에 가질 수 없게 되겠지요.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정부인데 그런 정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힘을 독점할 때 구조적 폭력이 생긴다고 볼 수 있지요. 문제는 종교가 구조적 폭력이 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열심히 하지도, 저항하지도, 잘못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같이 결합하면서, 아니면 어떤 식으로는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기의 이권을 챙기려고 할 때 종교와 국가의 담합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촛불집회에서도 봤잖아요. 일부 교회와 목사들이 기독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난 이유는 교회와 목사들이 기존의 국가 권력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권력에 동참하면 자기한테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구조적 폭력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선거가 끝나거나 선거 전에도 마찬가지에요. 후보들이 반드시 종교를 찾아가서 지지해 달라고 협조해달라고 인사를 하지요. 선가가 끝난 다음에도 인사를 합니다. 종교를 대표하는 기관들이 이제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사를 받지 못하면 힘이 없거나 권력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중소 종단은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무언가 맑고 순수하며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너무 밀착되어 있고 친한 것으로까지 보이고, 속으로 들어가면 국가 구조 내에 있는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불편한 상황이 보여지니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알게 모르게 많이 퍼져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종교와 국가 폭력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매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종교의 긍정적 역할도


서보혁: 저는 종교학을 하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종교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존재론적 본질이나 인생의 참다운 의미, 절대자의 원리, 우주의 형성 및 운동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자기 삶의 어떤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현재 자기 삶을 성찰하는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적극적 차원에서는 어떤 절대자, 신의 창조 질서를 이해하고 또 그 섭리에 자기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인권신장이 될 수도 있고,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종교에는 규범적인 것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종교 집단의 행태를 성찰하는 하나의 기준이나 거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종교를 규범적으로 바라볼 때 한 개인의 선한 마음,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생활의 지침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국가의 폭력성과 비민주성을 종교 교리를 기준으로 비판하고 종교집단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 종교인, 종교집단은 사회 집단의 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고 비종교인과 연대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종교의 사회적 위상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신정국가, 봉건시대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면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종교가 세속화 되거나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나는 특정 종교인이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국가의 성원, 국민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종교의 규범적인 이해와 현실적인 이해에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종교인 또는 종교 집단의 사회적 행동을 성찰하는 준거이기도 하고,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소통, 가령 공동선의 실현 과정에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의 역할이 작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 지난 3월 29일, 성주 소성리에서 열린 사드 반대집회에서 천주교 수녀와 원불교 교무들이 손을 잡고 연대했다. ⓒ 최진


원익선: 서보혁 교수님의 말씀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드리면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종교사를 공부하면서 종교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예를 들어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든가 하는 종교학적인 설이 있습니다. 학적인 논의를 일단 놓고, 종교의 발생은 불안과 폭력과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이 사회는 사실 수백 만 년 전부터 인류가 발생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내면화시킨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이러한 폭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노력 속에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라는 심리적인 감정으로부터 종교가 발생했지만 점점 국가라는 조직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종교도 나름대로 그러한 폭력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고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종조나 교조들은 사회적인 아노미상태에서 사회의 불의하고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이를 혁파하기를 주장합니다. 예수님, 부처님, 소태산 대종사나 이런 분들은 그런 경향성이 뚜렷하거든요. 국가가 장악한 폭력을 어떻게 누그러뜨려 온건하게 하고, 국가가 갈 길을 도와주면 좋을까 라는 종교의 역할이 종교 역사상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한편 종교가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하니까 국가의 조직과 일치되는 종교의 권력 시스템이 형성되고 유사국가시스템이 됩니다. 오늘날 과거에 종교가 지배했던 시대의 권력에 대한 향수나 습관이 남아있어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는 이제 현대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는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백화점의 상품처럼 되었습니다. 종교는 사실 개인 차원으로 돌아섰거든요.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이 종교로 저 종교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종교는 교의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교단 조직을 위해 폐쇄적인 면도 갖고 있는 것이죠. 선교나 포교나 교화를 위해서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막상 한 지역이나 국가 내에서는 폐쇄적인 구조를 통해서 스스로 조직적인 부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죠. 이처럼 종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종교 자체의 종교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해결 못할 법도 없는데 여전히 유한한 조직에 매달려있다 보니까 결국 국가와 종교는 그 궤가 대등하게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종교 자신이 이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확산시킬 때, 인류의 문제해결 능력 또한 그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종교 활용법


이찬수: 좀 전에 얘기 나왔듯이, 선거 전후에 정치인들이 종단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 것은 표를 의식하는 것 아니겠어요. 찾아오는 목적은 다소 불순하지만, 맞이하는 입장에서는 나름 예의를 갖춰서 맞아들이곤 합니다. 권력자가 자기 종단에 찾아오는 것을 은근 즐기기도 합니다. 심지어 독재자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자기 종단 혹은 종단 대표 입장에서 자기 종단도 권력에 가까운 종단이라는 자부심도 가지면서요. 이런 모양새를 정치학자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요? 독재자니까 접대 자체를 거부하면서 종교의 내적 양심이나 순수성을 지켜야 하는 건가요? 맘에 들지 않더라도 손님 차원에서 환대해야 하는 건가요?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도 궁금합니다.


서보혁: 선거를 비롯해서 현대 정치는 대중정치입니다. 어떤 정치든 간에 대중의 지지와 동원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정치 자체가 성립되지 않거든요. 정치권력이 자기의 정치적 필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죠. 현대 정치인은 광범위한 대중들이 모인 집단으로서 종교집단과 종교집단을 이끄는 지도자도 만나야죠.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만남인데 권력의 유지 재생산을 위한 상호 공존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정말이지 종교적 심성은 자기 개인, 자기 마음속으로 환원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중세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도 종교와 정치는 끝없이 만납니다. 종교와 정치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공동선을 위해서 협력하고 소통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종교가 국가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종교 본연의 위상과 종교 나름대로의 역할을 위해서도 적절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구별한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의 비유를 상기합니다. 종교 집단 내에서도 사회 선을 풀어나갈 수 있는 자기의 양식과 메커니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에 관한 종교 내부의 잠재력과 자원을 모아내는 과정을 선행하지 않고, 또는 그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종교는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종교지도자들이 독재자를 위한 축복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병두: 얼마 전 우연히 이번 정권 탄생에 기여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당부를 드린 것이 “종교계를 쫓아다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고, 국민들의 혈세를 모아서 각 종교계에 전달해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직선제 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중앙정부도 그렇고 지방정부도 그렇다고 합니다.


저도 이 부분은 동의를 하고 공감을 합니다. 어떤 종교사회학자는 이것을 종교정치라고 해서 소위 민주화 이후에 이루어졌던 종교와 정치관계 또는 정부의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분석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특히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게 김영삼씨가 1987년도 선거에서 졌는데, 결정적인 타격이 PK지역에 불교도들이 많이 돌아선 데에 있었다고 하지요. 노태우 쪽에서 김영삼은 개신교 장로라고 강조한 점도 있었지만, 김영삼씨 스스로 “나는 주일에 유세를 안 한다”라고 한 적도 있었죠. 그러니까 1987년 대선에서 종교가 누구를 당선시키지는 못해서 낙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입증을 했죠. 그 이후에 겁을 먹고 찾아다니는 것인데, 이것은 종교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죠.


정주진: 87년 그 상황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과연 국민이 그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문제제기를 해 봐야 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을 보면 선거법에 위반됨에도 불구하고 설교시간에 특정인을 찍으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기도 하잖아요. 과연 그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신도들이 다 그 사람을 찍을 것인가. 물론 특정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의 정권이 탄생할 수 없었겠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목회자의 생각과 신자들의 생각에 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하는 국가 권력과 종교권력의 밀착 내지 공생 관계는 신자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도 정치인들도 예전의 밀착 내지 공생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강화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리시키면 자기의 이익에 해가 미칠까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권력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는데


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성장을 보고 종교인과 정치인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보혁 교수님이 말씀 하신 것 중에서 종교가 진정성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언급과 관련해 저는 어떻게 보면 종교가 국가 권력과 너무 친하게 지내면서 오히려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종교가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든지, 영적인 부분을 강조한다든지, 실제 생활에서는 약자를 위해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과 관련해 진짜 영향력을 할 수 있으려면, 종교도 제 역할을 하고 정치도 제 역할을 하려면 종교인들이 자신의 양심에 의존해, 그리고 종교적 가르침인 경전에 의존해 정치인이 무섭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도덕적인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될 텐데 정치와 밀착되면서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종교가 오히려 다른 것에 눈이 팔려있으니까요. 선거나 또는 정치인들과 밀착해서 종교관련 시설 예산을 따내는 일도 있고요. 그래서 종교인 과세도 여태까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요. 결국 종교가 사회 변화를 위해서 정말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리고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일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아픈 점이고 종교가 국민들의 생각과는 굉장히 동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이찬수: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인’의 문제입니다. 국가가 있으면 국가 구성원으로서 국민이 있는 것처럼, 종교는 외부에서 이름 붙여놓은 조직일 뿐, 실상은 그 안에 종교인들이 있는 것이잖아요. 국민이 주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국가가 돌아가듯이, 정치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고 종교적 권력을 확장시키려는 저의를 가지고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종교인을 과연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요. 종교의 본질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경우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조직을 빙자해서 자신의 권력욕을 확장시키려는 그저 그런 사람 정도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과 연결됩니다.


서보혁: 종교와 정치, 국가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긴장을 유지하며 비판적인 협력관계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규범적인 차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도 종교와 국가의 존재 이유가 다른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관이 크게 다르지만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는 국가가 인류가 만들어낸 합법적인 폭력집단이라는 정의에 한 목소리를 냅니다.


종교는 폭력집단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거나 개인 내면의 깊은 상태를 찾아가는 종교는 폭력과 태생적으로 인연이 없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비폭력성 또는 평화를 추구하고, 인류와 우주를 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국가와 종교는 서로 거리가 있는 관계죠.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지배하는 세력이 정치권력이죠. 이것을 장기화하고 지속하는 것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적·문화적 폭력, 대중의 자발적인 동원과 복종을 이끌어 내는데 종교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려는 유혹을 정치권력이 늘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종교가 자기의 존재론에서 서서 규범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면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멀리하고 일부 종교인은 자기 종교를 버릴 겁니다. 그럴 경우 종교는 종교성을 잃어버린 종교로 남아 세속적인 사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구분이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종교인 중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종교와 국가가 보여주는 결탁, 공모 관계들을 사회가 어떻게 선을 긋고 이 사회에서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인가. 이 부분이 오늘 또 다른 테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경우


원익선: 제가 최근에 연구하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가 그런 현상입니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힘이 없던 근세 천황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또한 국가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연신앙으로부터 종교화된 신도를 국가신도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불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를 예속시킵니다. 국가종교의 하위구조에 모든 종교의 질서를 구축한 것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등에 일본은 수백 만 명의 국민을 사지로 내몰아서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교의를 왜곡시켜 전쟁참여를 부채질했습니다. 소위 전시교학이 그것입니다. 국가가 지배하는 시대를 추종하고, 국가의 요구에 응해 교학을 바꾼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불살생의 계율을 살생의 계율로 바꾼 것입니다. 내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그 자리가 천당이자 정토라고 믿고, 죽어서 가는 야스쿠니 신사는 죽은 모든 사람들이 만나는 정토이므로 죽어서 야스쿠니 정토로 간다며 불교의 교의를 철저히 왜곡시켰습니다. 


▲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 된 야스쿠니 신사.


이것과는 반대되는 적나라한 사례가 역사 속에 있습니다. 일본 근대 초기에는 많은 승려들이 불교가 국가의 폭력 조직으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거나 목숨을 걸고 국가체제에 항거하여 실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례가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고, 지금은 관련된 교단들이 참회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종교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국가 조직의 하부구조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는 하는 점은 자명하게 그야말로 종교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것이 역사에서 증명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작은 결론입니다만 국가는 국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종교 또한 자신의 역할을 통해 서로를 어떻게 잘 길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민중이 주인이 되어 운영하는 국가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되살려져야만 합니다. 실재 한국사회도 이러한 민중주도형 국가로 진행되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종교는 종교 조직과 종교인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종교의 근본 목표가 잘 드러날 수 있는 방향으로 나름대로 자기개혁이랄까, 종교정신의 근본적인 환원이랄까, 이것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합니다. 그러는 한편 종교의 바른 역할을 통해서 국가를 견제하고, 국가는 국가 나름대로 종교가 반종교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보편타당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어진다면 국가가 못하는 것을 종교가 하고, 종교가 못하는 것을 국가가 하는 상보적인 구조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병두: 교무님께서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 불교가 아주 철저하게 정부에 예속되어서 즐긴 측면도 있고, 이미 청일 전쟁부터 군종장교가 파견이 되고 죽음을 격려하는 법문도 많이 하고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시아에서 그렇다고 하면 특히, 무솔리니 정권이나 스페인의 프랑코 군사정권, 또 히틀러 체제에서는 아마 가톨릭이 정권에 예속되었다기보다는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컸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 반성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못 들었어요.


어쨌든 일본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정교 분리가 잘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종무관 재직할 때에 국제 불교행사에 참석해보면 중국과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정부 관리가 행사장에 단 한 명도 안 나타나고 예산 지원도 안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일본의 불교계가 사죄의 글을 내기도 했고, 실제로 한국에 와서 사죄 비석을 세우기도 했지요. 1965년에 한일 조약이 체결되고 76년인가 78년부터 ‘한일불교교류대회’를 개최했죠. 일본에서 한 번, 다음 해에는 한국에서 한 번 돌아가면서 교류행사를 가져왔습니다. 그 동안 이 ‘한일불교교류대회’를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는데 올해 이것이 멈추었습니다. 일본 측에서 한반도 정세불안을 이유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베 정권이 여론 조작을 통해서 “국제 전략적으로 한국이 불안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에 일본 불교계가 부화뇌동한 것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한국 불교계가 일본 측의 논리와 주장을 왜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우리도 일본 불교계와 이런 식의 교류는 안 하겠다”고 마주치고 나가야 맞지 않으냐는 것이죠.


[필진정보]
이찬수 :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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