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남과 북의 만남과 대화를 지지하시면서 평화의 한반도가 되기를 염원하셨다. 착한 목자이시며,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교황님의 행보를 통해 복음을 사는게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이에 대비되어 한국 교계 지도자들은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 현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수수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세상 안에서 교회의 존재감은 참으로 초라할 지경에 이르렀다. 새해는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되는 원년이 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요한, 생명이야기’ 두 번째 시간으로, 먼저 요한복음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본다.
첫째,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우리는 요한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먼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너는 왜 예수를 찾느냐?”, “너는 십자가를 사느냐?”고 집요하게 묻는다. 요한의 질문에 답하며 예수를 읽는 것이 이 복음의 특징이다.
둘째, 요한복음서는 나선형구조의 책이다.
공관복음은 일직선 형태로 예수의 역사적 전기를 서술하지만, 요한복음은 나선형 구조로 최종 지향점을 향해 원 밖에서 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식이다. 요한의 최종 목표점은 ‘예수의 십자가’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한다. 요한의 핵심 메시지는 ‘십자가를 만나지 않고는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는 것’이다.
셋째, 희랍어로 쓰인 요한복음은 헬레니즘 문화권의 토양 위에서 생겨난 작품이다.
요한 공동체는 에페소 지역에 있었으며 이 지역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속한 지역이다. 그래서 요한 공동체에는 플라토니스트(platonist)들이 많았다. 희랍어를 사용한 교양인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요한 공동체는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다보니 헬레니즘의 철학적 담론을 많이 참고하였다.
요한복음 서문(Prologue)은 1장1절부터 18절까지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장 1절). ‘처음’이라는 시간 개념이 나온다. 시간 속으로 들어온 ‘말씀’을 뜻한다. 일부 학자들은 ‘한 처음’을 천지창조 이전의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시간과 공간 밖의 ‘말씀’으로 선재(先在) 교리를 강조하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말씀은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Christ)를 지칭하는 것이다. 시간이전(Pre-temporal)과 초현실적 상태의 말씀은 존재할 수 없다. 말씀은 시간과 공간 내에서 존재의미를 갖는다.
말씀은 인간 생명이 되셨으며, 그 생명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생명은 하느님이셨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을 화두로 삼으며, 말씀생명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우리 인간은 세상에 들어오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고, 말씀으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구하고, 말씀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말씀을 인간 세상 이전으로 간극을 만드는 선재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대와 함께 가지 않는 복음 선포, 산토끼 잡기커녕 집토끼마저 잃어버리게 될라
저 머나먼 천국에서 말씀이 필요할까? 정작 말씀이 필요한 곳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며,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은 사람들의 현실이고 현장이다. 말씀을 저 멀리 모셔놓고 받드는 일은 가짜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에 불과하다. 말씀은 진정 우리에게 오셔야 한다. 우리와 함께 존재해야 한다.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희랍어로 ‘말씀’은 ‘Logos’다. 희랍어 로고스는 ’말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로고스는 ‘말씀’, ‘언어’이다. 우리가 말한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이유는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도 언어의 발달과 더불어 문화문명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인류 진화 과정에서 직립보행을 하게 되는 직립원인인 호모 에렉투스의 출현은 언어의 출현이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머리가 척수에 일직선상에 놓이게 됨으로써 성대가 넓어져 20~26가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직립보행으로 인간에게 언어가 가능해졌다.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말씀과 언어’는 인류 생명의 진화사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 것이다. 우주의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라는 능력을 갖추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다. 희랍인들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동물의 ‘의식현상’이 인간에게는 ‘정신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정신현상은 ‘사회성’에서 온 것이다. 인간 정신 현상을 출현시킨 사회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신현상> 사회성> 언어 발달이라는 과정이 인류 진화의 역사이다. 언어의 발달은 인지능력의 발달로 이어지며 문명의 진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요한의 선언은 멋지고 화려한 내용으로 적당히 치부될 수 없다. 이 구절은 인류의 생명사와 진화사, 문명사 전체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리의 본질을 담고 있다. 복음 선포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는 가두선교의 싸구려 선전구호가 되어선 안 된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예비자 교리 수준에서 복음을 접근하면 산토끼를 잡기는커녕 집토끼마저 다 잃어버리게 된다. 지금부터라도 안일하고 폐쇄적이고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 세상의 학문적 업적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진보적인 학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복음의 진리를 탐구할 때, 복음은 생명의 말씀으로 진정 이 땅에서 수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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