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노자3장)
잘난 사람을 떠받들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 얻기 힘든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라.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로써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며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아는 바가 따로 없어 욕심이 없게 하고, 무릇 안다는 자로 하여금 감히 나서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파파(papa)라고도 불렀던 사람의 자리
가톨릭대사전 주교에 대한 정의다. “하느님의 제정하심에 따라 성령을 받아 사도들의 지위를 계승하는 주교 즉 감목(監牧)은 교회 안에서 세워진 목자들로서 교리의 스승들이요 거룩한 예배의 사제들이며 통치의 봉사자들이다(교회법 375조 1항)”
이어 주교의 권리와 의무다. “지역교회의 사목 책임을 맡은 주교는 교황의 권위 밑에서 정상적으로 직접 교회를 돌보는 목자로서 교도직과 사제직과 사목직을 수행함으로써 주의 이름으로 자기 양들을 양육한다(주교교령 11). 교도직을 통해서 주교는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신앙에로 불러들이거나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한다. 또 그리스도를 알기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친다. 그리고 하느님을 현양하고 그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도록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길도 가르친다(주교교령 12). 사제직을 통하여 주교는 담당 지역교회를 상화시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의 의의가 빛나게 한다. 신품성사의 충만을 지니며 하느님 신비의 으뜸 관리자이자 전례생활의 감독자요 수호자이다(주교교령 15). 사목직을 통하여 주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알도록 하고 참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양떼를 보살핀다. 이러한 사목적 노력에 있어서 신자들도 적절히 교회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신비체 건설에 능동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의무와 권리를 인정한다(주교교령 16)”
천주교회는 주교들의 교회다.
분명 천주교회는 주교들의 교회다. 교구장을 맡고 있는 주교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이러저러한 소화되어지지 않는 해설을 하지 않아도 단지 그 복장만으로도, 지팡이를 짚고 걷는 모습 속에 담긴 근엄함과 엄숙함에 주일학교 개구쟁이들도 다 숨을 판이다. 요즘 하는 말로 하자면 한마디로 “쩐”다. 주교가 되는 순간 ‘가까이 가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만약이라도 자신이 주교와 가깝다고 말하는 사람은 완전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럴수록 분명 주교들의 소임은 막중하고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2013년 11월 30일 로마의 대학생들과 함께 저녁기도를 하던 교종 프란치스코가 젊은이들에게 했던 말 “삶을 발코니에서 바라보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도전들이 있는 그곳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고자, 좀 더 발전시키고자 애쓰는 이들이 여러분들께 도움을 청하는 그곳 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 빈곤을 타파하려는 몸부림. 가치들을 위한 고군분투. 매일 직면하게 되는 많은 삶의 투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사실 젊은이들이 아니라 주교들에게 해야 할 말이기도 하며, 주교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었다.
주어를 주교로 바꾼다면
노자 3장의 주어를 ‘주교’로 읽는다면 그 뜻이 명징해 질 것이다. “주교들은 잘난 신부나 평신도를 떠받들지 않음으로써 교구민이나 신부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라. 성지개발이나 병원, 학교 사업 등 얻기 힘든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교구민이나 신부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하라. 복음화 목표율이나 본당 신축 등등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교구민이나 신부들 혹은 스스로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로써 주교의 다스림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교구민이나 신부들의 필요한 것을 도와주고, 일 욕심을 약하게 함으로써 교구민이나 신부들의 의지를 건강하게 하며 언제나 교구민이나 신부들로 하여금 헛똑똑의 아는 바에서 비롯된 욕심이 없게 하고, 무릇 안다는 교구민이나 신부들로 하여금 감히 나서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할 때 하느님이 창조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2017년만 하더라도 천주교회의 조직원들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이 몇 번이나 거듭되었다. “신부들이, 수녀들이 어떻게 이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 사람들이 더 모르는 뉴스-당연히 교회발행 기관지에는 실리지 않으니-는 일간신문과 공중파 방송뉴스 심지어는 심층취재 프로그램의 단골 먹이로 등장했다. 부끄럽지만 지금여기의 실시간 라이브 상황이다.
주교들의 운동으로 삼아야 할 일
자업자득이었지만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정기 주교회의에서는 이런 ‘사람의 일’이 논의될 리 없고 거룩한 ‘하느님의 일’만 다루고 있다. 그럼 누가 이것을 감당할 것인가? 셀프정화? 그야 말로 하느님 맙소사다. 그럴수록 1988년 시작되어 차량 뒷유리 스티커로 화석화된 ‘내 탓이오’는 평신도운동이 아니라 주교들의 운동으로 새롭게 삼아야 한다. 삼시세끼 식후 삼십분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는다면 지난 주 노자 2장의 마무리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머물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不居不去 불거불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