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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3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8-01-19 11:16:25
  • 수정 2018-01-19 11: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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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요나 3,1-5.10) 해설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어 그 악행을 버리고 회개하였다>


인간들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은 그 어떠한 제한도 받으실 수가 없다. 그 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신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어느 특정한 집단이나 교회 울타리 밖에까지 당신 자비를 베푸신다.


오히려 그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요나서의 저자는 그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요나는 이방인 도시 니네베로 파견되어 가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곧 니네베 전체가 멸망하리라고 예고한다.


요나 예언자는, 자기가 그러한 사실을 예고하면, 니네베 사람들이 혹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자비와 구원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


요나서의 저자는 요나라는 인물을 통하여 유다인들이 지닌 편협한 사고방식을 꼬집는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베풀어 오신 끊임없는 자비를 체험한 나머지, 그 자비가 자기들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지는 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나서 저자는 귀양살이 이후 시대에,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집념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이 선민의식과 배타주의에 빠져 있음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니네베 사람들은 즉시 악한 행실을 끊고 회개한다. 그 이방인들의 태도가 오히려 고집 세고 독선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는 셈이 된다. 오늘날의 교회도 자기가 생겨난 목적이 모든 백성과 온 인류를 구원하는 데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시편(24) 해설

<주님, 당신 길을 제게 알려 주소서>


회개하라고 초대하시는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여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실천적으로 그 말씀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촉구 받고 있다. 이승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실상 ‘길을 가고 있는’ 존재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해 있지 않은 상태에 있는 존재다. 그 길을 바르게 가려면 무엇보다도 그리고 필수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과 인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한사코 바른 길에서 벗어나려 하는 죄스럽고 가련한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에게 하느님은 정의(하느님의 뜻)를 따라 걷게 하고 당신 길을 배우게 하신다. 어질고 자비로운 하느님은 뉘우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신다. 


제2독서(코린 7,29-31) 해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간다>


이 대목은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형태를 미리 맛보는 동정생활에 관하여 말한 내용(7,25-40) 가운데 들어 있는 대목이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바오로는 땅 위에서 일생을 살아가되, 그리스도께서 당장 오늘이라도 당신 영광을 떨치며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이 권고하신 대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깨어 있으면서 결국 사라지고 말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 당장 주님이 다시 오셔도 될 만큼 준비하고 기다리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참조. 마태 24,43-44).


주님이 당장 다시 오실 것처럼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사회 질서와 긍정적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발전(인류 공동선에 기여하는 과학과 기술진보까지를 포함한 발전)은 어느 단계에 가서 그리스도화(인류의 공동선이 지향하는 중심이요, 핵심이요, 정점이요, 도달점인 그리스도화)할 것이며,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영광과 빛과 풍요에 싸여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롭고도 영원한 차원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함은, 인간사와 세상사를 자질구레하게 여기고 거기서 벗어난다는 망상과는 정반대로 바로 그 인간사와 세상사야말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구현되어야 하는 현장임을 엄숙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인간들끼리 맺는 관계, 나라들끼리 맺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관계를 그리스도의 마음씨와 하느님의 정의・사랑・용서라는 통치이념이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몸 바치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한 관계들이 완숙 단계에 다다를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다시 와 계시는 것이며, 그때 그 눈부신 광채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복음(마르 1,14-20) 해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대목에서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행하신 설교와 맨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사실을 요약하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자세하고 결정적인 선언으로 시작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언은 하느님이 마침내 인류를 위하여 가장 중대하고 결정적인 구원 행위를 하셨다는 선언이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고 말씀하시기 시작했다고 말한다(4,17).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순서를 바꾸어 ‘때(하느님이 결정적 구원 활동을 펴실 때)가 차서’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갈릴래아에 현존하여 계시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예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이 채워졌음을 강조한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현존하여 있는 현실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을 비추어 준다. 예수님의 선포와 설교가 이 세상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증명한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증명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관계와 인간사회와 인류사회에 끊임없이 자극과 충격을 주어 양심을 일깨운다. 그 어떠한 인간차별・분열주의 그리고 우월감・열등감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를 따라오라.’는 초대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부르시는 초대다.


그리스도를 따르자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무관심과 싫어함과 멸시와 빼앗기와 죽이기를 중단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을 자기의 살과 피와 목숨을 내어주며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노력하노라면 그 그물에 많은 사람들이 걸려들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힘을 합하다 보면, 새로운 인류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어 갈 것이다.


묵상


생활 태도로 나타나는 회개


회개한다는 것은 무슨 고상한 이념에 집착한다거나, 어떤 고매한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회개란 자기 인생목표와 생활방식을 바로잡고 개조하는 일, 자기중심주의와 남을 짓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을 벗어 던지는 일을 뜻한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란 하느님을 믿고 자기 행실을 고치는 것을 뜻했다. 갈릴래아 어부들에게, 회개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을 뜻했다. 말씀을 건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개인 욕심을 버리는 것을 뜻했다. 그리스도처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뜻했다.


간단히 말해서, 회개란 어떤 정신 상태나 내적 태도만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온갖 세상사 앞에서 취하는 새로운 처신과 생활방식을 뜻한다.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이 인류에게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인류 해방과 구원은 이제 멀리 있는 뜬구름 같은 무엇이 아니게 되었다. 하느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인류 역사에 생명을 주는 원리로서 뿌리내리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는 이제 인간・인류와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고, 인간들은 아버지 하느님의 똑같은 형제자매가 되는 상태다. 가진 것과 피와 살과 목숨까지 서로 나누는(성체성사적) 사랑이라는 법률이 통치하는 상태다. 그 하느님 나라가 인류 공동체 역사 현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런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고 실현되고 있는 까닭에, 인간은 그 놀라운 사실을 보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회개란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가 베푸는 선물이다.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고, 인간과 인류를 악의 세력(개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과 인간을 억누르는 사회 제도・구조・체제)에서 벗어나게 하여 구원하는 길을 찾아 얻을 수 있는 것도 그 선물 덕분이다.


회개하라고 초대하는 말씀은 항상 그 말씀을 말과 행동과 생활실천으로 전달하는 사람을 통하여 건네진다. 요나는 가능한 한 하느님이 맡기시는 임무를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별 수 없이 마음을 고쳐먹고 니네베 사람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경고문을 선포한다.


갈릴래아 어부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다음, 그리스도의 인생목표를 자기네 인생목표로 바꾼 다음에야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식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와 바탕 때문에 더욱 쉽게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오늘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나라는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초대를 늘 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회와 인류공동체가 단합하고 평화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 단합과 평화공존을 위하여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을 통하여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바치라는 초대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면 된다. 그 같은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리스도처럼 인류의 일치를 위하여 자기 소유와 능력과 자기 목숨까지 송두리째 내걸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통치는 성큼 다가와 임하는 것이다. ‘주님 어서 오소서.’(마라나타)라는 그들의 실천적인 탄원에 의하여 ‘마지막 날 다시 오실 주님’이 성큼 다가오실 것이다.




연중 제3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요나 3,1-5.10)

<니네베 사람들이 그 악행을 버리고 회개하였다>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시편(24)

주님, 당신 길을 제게 알려 주소서


제2독서(1코린 7,29-31)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마르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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