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적이 없다. (요한 1, 5)
어둠은 무엇인가? 죽음에서 나온 것을 어둠으로 표현한다. 죽음과 어둠은 ‘거짓’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면 하느님의 말씀을 못 보게 되는데,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된 삶’ 때문이다.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느님 말씀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한 서문의 메시지는 우리가 Logos(말씀)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둠에 속한 자이며 죽음의 그늘진 세계에서 죄와 악의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과 로고스와 생명과 빛의 세계에 속한 자들을 대비하여 요한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 안에서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홍준표, 나경원, 김성태 같은 부류들, 미국의 트럼프는 거짓말로 진실을 왜곡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둠에 속한 자들이고,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악의 화신들이다.
어둠에 속한 자들의 특징은 ‘죄책감과 공포감’을 조장한다. 자신들의 부정한 죄를 감추기 위해 타인들에게 죄의식을 부추기고, 공동체 평화를 깨뜨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그들의 통치원리다. 마치 탈출기에서의 파라오와 같다. 백성들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중노동에 시달리게 하여 서로 간에 다투게 한다. 지배자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막는 수단은 인간들이 오직 생존문제에만 매달리게 하는 것이다. 매일의 삶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벼랑 끝에 있는 사람은 온전한 생각을 하거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파라오 지배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원리로 작동한다. 무한경쟁과 20:80의 불평등한 소득격차 사회 구조는 어둠의 세계다.
김기춘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야간의 주간화”를 지시했다. 국민들에게 밤에도 뼈 빠지게 일을 시켜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비판도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권력의 실세였지만, 그러나 그는 예수를 추종한 자가 아니라 파라오처럼 국민들을 괴롭히고 억압한 어둠의 자식이다.
지배자들의 통치 원리인 ‘죄책감과 죄의식, 공포감’은 한국 종교도 적절히 활용하여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가정 우환의 원인을 찾으면서, 조상들이 지은 죄가 많아서 사업이 망했다느니, 그래서 자식이 대학에 떨어졌다느니, 부인이 암을 생겼다느니, 등등 복음 정신과 동떨어진 해석을 갖다 붙인다.
현재의 불행이나 질병을 죽은 조상이나, 부모가 쌓은 죄업이 그대로 남아서 후세들에게 불행한 결과가 온 거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자식들이 죽은 조상들의 죄를 갚아야 한다고 사기치고 장난치는 성직자들도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에도 1990년대와 2000년도 중반까지 이런 엉터리 장사꾼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여 교회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공포감을 조성하여 유대교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한 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와 울법학자들, 사두가이파들이었다. 예수로부터 호되게 질책과 비판을 받은 위선자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일부 교회 지도층과 성직자들은 현대판 위선자들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전반을 읽어보면 예수는 사람들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임을 알리신다.
죄의식은 빛을 가리는 어둠이고, 생명을 파멸하는 죽음이다. 파라오의 지배 원리는 ‘거짓, 죄, 어둠, 죽음의 공포’이지만 예수의 생명 원리는 로고스에 바탕을 둔 ‘자유, 빛, 진리’이다.
요한 공동체 시기는 암울한 절망과 어둠의 시기였다. 팔레시티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독립 투쟁에 나선 농민과 민중 봉기가 극심했으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저항했고, 그들은 십자가의 극형으로 죽어갔다. 예수도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민중들의 저항에 동참한 청년 예수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단, 신학적인 해석은 배제한다)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짙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일상이었다. 요한 공동체는 소아시아 지역인 에페소로 이전했지만 이곳도 로마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여전했다.
요한복음이 시작부터 유독 ‘생명’을 전면에 내세운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그 시대 상황과 박해의 현실 안에서 예수를 추종하고 묵상하며 살았던 삶의 자리를 주목해야 한다. 요한 공동체가 예수 때문에 겪은 삶과 순교, 그리고 죽음의 기로에서 복음은 생명의 문제로 집약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시대에 한가하게 뒷방 응접실에서 쓴 복음의 기록이 아니다. 그가 왜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로고스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던졌을까? 시대의 어둠이 짙었기 때문에, 빛을 갈망했고, 죽음이 만연했기 때문에 생명을 갈망했고, 지배자들의 억압에 시달리던 비참한 고통 때문에 로고스의 세상을 갈망했던 것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가 온 세상은 어떠했는가를 정확히 주시해보라고 초대한다. 그 시대에 예수는 어떻게 살아가셨는지를 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라고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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