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레위 13,1-2.44-46) 해설
<불결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레위기는 실상 레위 지파의 사제들이 사용하던 전례와 예절 교본이다. 레위기는 일련의 율법 규정과 예절 수칙을 수집하여 담고 있다. 그 규정과 수칙은 생활의 모든 면들을 세세하게 지시하여 흠 없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는 유일한 기초로 보았다.
오늘 읽은 대목은 법적 정결에 관계되는 율법에 속하며, 나병에 관한 준칙들을 정하고 있다.
나병을 지칭하는 ‘네가’라는 단어는 원래 ‘상처자국, 터진 피부’를 뜻했다. 터진 피부는 하느님이 죄인들을 벌주시는 표시로 보았다. 이렇게 해서 나병은 하느님께 벌 받은 상처 자국으로서 그 사람이 죄 중에 있다는 명백하고도 피할 수 없는 표시로 보았다. 따라서 죄의 표시가 몸에 박혀 있는 나병환자는 불결한 자로 취급되어 다른 백성들의 생활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45-46절).
레위기의 법 규정은 틀림없이 지나치고 잔인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금지 규정이 지닌 종교적 성격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병환자와 같은 죄인을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죄악이 전염되는 것을 막으려는 종교적 조치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편(31) 해설
당신은 내 피난처이시니,
구원의 기쁨으로 나를 휘감아 주시리이다
인간은 흔히 전염병에 걸린 다른 사람 앞에서 본능적으로 그를 피하려 하고 어떤 때는 그를 격리 수용하려 한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통감하는 죄인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태도는 우리 옹졸한 인간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인간이 자기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는 그 순간, 하느님이 얼마나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사랑에 넘치시는지를 체험할 것이다. 그 때문에 시편 작가는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을 복된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른다.
제2독서(1코린 10,31-11,1) 해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이 구절들로써 코린토 그리스도 신자들이 우상 앞에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고 제기한 질문에 대한 바오로의 답변이 매듭지어진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바오로의 그 같은 답변은 생생하게 현실성을 띤다.
바오로는 실상 우상들이란 존재하지도 않다고 단언한 다음(8,4), 우상 앞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먹어도 좋다.’, ‘먹으면 안 된다.’고 구분하는 자세를 뛰어넘는다. 항상 ‘애덕’을 기준으로 삼고 이웃의 참된 선익만을 꾀하라고 초대한다.
어떻든, 바오로는 유다인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든 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데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교회가 자라고 거룩하게 되는 일에만 전념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오로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실제로 바오로는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항상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인류 구원을 위해 몸 바치려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끊어버리는 완벽한 표양을 보인 바오로를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본받는 것에 버금간다. 그러므로 바오로가 내리는 결론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표양에 따라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인류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인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마르 1,40-45) 해설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나병 환자는 법적인 ‘불결’을 몸에 지닌 자로서, 인간 사회와 동떨어져서 살아가야 했다. 모든 사람에게 배척받았다. 운명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치 송장처럼 슬퍼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마르코가 보고하는 나병 치유 기적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에서 제외된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도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만들어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여보내심으로써 깨끗한 자와 불결한 자 사이의 분리・분열・울타리를 기적적 행동으로 허물어뜨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나병환자를 신체적으로 도와 주신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인간 품위를 되찾아 주신 것이다.
마르코의 보고는 강조되어야 할 몇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ㄱ)나병 환자의 비참한 처지가 예수께 ‘동정심’을 일으킨다. 동정심이란 상대방의 가련한 처지를 마치 자기 처지인 양 아프게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동정심으로 행동을 하신다(41절). ㄴ)나병환자는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께 깊은 믿음으로 간청한다(40절). ㄷ)예수님께서는 모두 싫어하고 피하는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깊이 느끼신다. ㄹ)예수님께서는 치유 받은 그 사람에게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리고, 깨끗하여진 것을 사제들 앞에 보이라고 명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의 권능으로 기적을 행함을 분명히 하신다. ㅁ)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다. 이는 당신 사명을 올바르게 아버지의 뜻대로 수행하기 위해 사람들의 왜곡된 반응을 피하시려는 것이었다. ㅂ)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널리 퍼뜨렸다. 이는 주님의 자비를 받아 깨끗하여지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의 자연스런 태도를 가리킨다. 주님한테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남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묵상
소외당하는 천덕꾸러기들이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는다.
이스라엘 율법이 육체적으로 불결하고 도덕적으로 죄인이라 하여 인간 사회에서 내쫓았던 그러한 나병환자를 온갖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큰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서 치료해 주고 인간 사회 속으로 다시 들여보내신다. 이는 인간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천하게 여기고 소외시키는 온갖 규정과 태도를 고치고 타파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행위이다. 그런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편익’을 찾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쪽’을 택해야 한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기 보존본능이란 게 있어서 자기를 공격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려는 온갖 것에 반사적으로 방어하고 대처한다. 이 보존본능에 이기심・이기주의가 첨가되고 보면 자동적으로 소외의 논리가 생긴다.
구약 시대에 나병환자들은 격리 수용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사회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질서를 위협하는 자들로 취급되었다. 무슨 그만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치유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는 그들과 접촉을 피하고 벗어나야 하고 그들을 격리시켜 자신을 보호해야 마땅하다는 소외의 논리가 생겨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그 같은 참혹한 소외의 논리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임을 어찌하랴.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 늙은 사람, 정치적으로 박해당하는 사람, 갇힌 사람, 제3,4세계에서 참담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무수한 사람들이 사정없이 격리되고 고문 받고 처형당하고 있다. 오늘의 인간 사회가 어제의 인간 사회보다 낫다거나 발전했다고 자부할 만한 부분은 어디일까?
예수님께서는 ‘꼴찌들’을 데리고 출발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태도와 처신은 그와 전혀 딴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나병환자와 만나신다. 그 나병환자와 간격을 두고 떨어져서 수작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 손으로 만지면서(41절), 그 나병환자와 당신이 굉장히 친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소외된 사람과 친하시기 때문에 그를 곤혹스런 처지와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고(42절), 그를 떳떳하게 살라고 인간 사회 속으로 다시 들여보내신다(44절).
그런 행동이 법으로 엄금되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애착하는 그런 배척당하고 서러운 사람을 과감히 옹호하고 변호하고 어엿한 인권을 되찾아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그 어떠한 법도 관습도 단호히 배격하고, 인간을 그릇되게 단죄하는 그 어떤 폭행에 대해서도 당신 목숨을 걸어놓고 부딪치신다. 모두 흔히 싫어하고 피하는 부류의 사람들, 세리・창녀・나병환자・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십자가를 지고 칼바리아 정상을 향하여 나아가신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을 끝까지 나누신다.
소외라는 문제는 오늘 우리 인류에게 있어 각별히 심각하다. 오늘 전례는 그 문제를 철저히 반성하도록 촉구한다. 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답은 분명하다. 남은 것은, 우리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가정・직장・단체・국가사회・국제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답게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이다.
신자들도 엄연히 사회에 속하는 어엿한 하나의 단체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신비스런 공동체로서 자기 태도와 입장과 선택과 결정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 인간을 가볍게 알고 무시하고 천대하고 방해되면 쫓아버리고 가두고 때리고 처치하고 처단하는 악마의 세력(어떤 때는 사회통념이 되어 있다.)에 편들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배척받는 사람들・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폭력과 전쟁 위협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인 인류 대부분을 편들 것인가 하는 방향과 진로를 분명히 밝힐 일이다.
그 길은 그들과 함께 견디며 십자가의 승리를 지향하는 길이다. 그 길은 신자들이 따뜻하게 제 몸 건사하고 배부르게 기름지게 잘 먹으면서 동시에 걸을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신자들이 걸어야 할 그리스도의 길로서 피땀 흘리며 고뇌하고 새로운 인류・하느님의 나라를 탄생시키기 위해 산고를 겪어내는 순교의 길일 뿐이다.
연중 제6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레위 13,1-2.44-46)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시편(31)
당신은 내 피난처이시니,
구원의 기쁨으로 나를 휘감아 주시리이다
제2독서(1코린 10,31-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마르 1,40-45)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