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노자 6장)
곡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뿌리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서 항상 존재하는 것 같으니 아무리 써도 힘겹지 않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페북 친구의 글
성당엘 46년째 다니다 보니 이런 공지사항도 만나게 되네. “제가 부임한지 10일 되었습니다… 보좌신부님이랑 상의해서 결정한 겁니다… 영명축일 행사, 서품기념일 행사 안합니다. 봉성체, 축복식 등에 사례비 안 받습니다.” 박수 칠 뻔… 인천에서 가족들이 **할머니 봉성체를 챙기면서 예물봉투를 준비하는 것 때문에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반회비로 준비하기도 그렇고 우리가 사비로 하기도 난감하고. 신부님께 터놓고 말씀드리니 몰라서 안하는 분들이 있으니 당신들은 알려주는 것이지 형편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된다 하셨던 기억. 그래도 모두에게 안 받는 게 아니면 준비 못한 빈손이 부끄럽고 민망한 게 사실… 어쨌거나 너무 돈돈 거린다고 투덜거린 게 무슨 기도가 된 거 마냥 기대도 못한 응답을 받은 거 같다. 아, 게다가 본당 운영, 현안에 관련된 신자들의 의견을 듣겠다 하셨다. 뭐지? 어쩌다가 이런 봄날이…
어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 아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온당할 일을 본당생활 46년차 평신도가 고민한다면 그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새삼 이런 저런 일에 이른바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나, 이런 저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신기하게 여겨지고 마치 봄날이 온 듯한 기분으로 맞이한다면 그것은 마냥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여기는 아직 케케묵은 중세기거나 아니면 잘못 이식된 종교문화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에서 파생된 이교집단일 뿐이다. 사실 한 본당의 일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정이 오십보백보 실정이다. 왜들 이럴까?
비어라 기어라, 그곳이 생명의 자리이니
욕심이라는 마음이든, 재물이라는 형상이든 비우는 일이 먼저일까? 채우지 않는 일이 먼저일까? 마치 닭과 계란의 논쟁을 연상시키는 질문이지만 그것이 어느 것이든 쉽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루를 살아가기에 급급한 지경이라 ‘대마불사’는 들어봤어도 ‘곡신불사’는 못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쉽지만 알속 같은 의미를 건네준다.
“골짜기는 비어 있지 않은가? 골짜기는 비어 있는데, 여기서 곡신이라고 하면, ‘비어 있는 신령함’이라고 할까? 그런거지. 말하자면 도道를 가리키는 거라. 도를 얘기하는 거야. 그걸 공空이라고 해도 좋고, 그러니까 공이나 도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지. 기독교말로 하면, 우리 하느님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무시무종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는(인용자 주)-하시다는 말이 되겠지.”(위 책 107쪽)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신앙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불신자라는 사실이다. 세례를 받거나, 여러 성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병통치약이거나 장땡이 될 수 있는 패스포트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의심하는 자가 누구인가?
예수의 철저한 자기부정 역시 비어있음의 다른 형태이며 그 비어 있음에서 신비로운 긍정의 문이 열리며 마침내 빈 무덤의 아침이 다가오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을 체험하려 해마다 우리에게 사순의 시기가 다가오고 부활을 전례로서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살아서 죽은 것이고, 지금여기에서 부활의 기쁨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한다. 이웃 종교 역시 용어와 형식의 다름 속에서 깨우치고 바라보고 밝아져 스스로의 삶을 고백하며 나누고 있다.
영명축일이나 서품기념을 주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행사로 만들지 말아야 할 일이다. 감사는 행사로서 표현될 수 없다. 감사는 주님께 올리는 일이지만 행사는 사람에게 올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몸을 필요한 이에게 직접 가서 영하게 해주는 은혜로운 봉사에 사례비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다. 주님이 친히 말씀한 것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라고 겸손하게 섬겨야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인가? 첫 마음을 너무 멀리 하지 마라. 첫 마음이 사라진 곳에 의심의 재가 덮여서 하늘의 길과는 반대의 길로 달음질 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본당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 절실하다. 평신도 정체성이나, 사제 혹은 주교 정체성이 아니라 신앙인 정체성이 우선이다. <의상철학>을 말했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육체 혹은 자연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상징인 ‘의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의상철학을 통해 자연적인 것에서 초자연적인 의의를 인정하고, 도덕적 실천에 종교적 가치를 부여했다.
벌거벗은 사람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찾는 법이다. 태초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벌거벗고 태어나며,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존재 앞에 늘 벌거벗은 몸이다. 그 벌거벗음 몸에 입힐 ‘새로운 옷’ 한 벌을 무엇으로 택할 것인지 철학자 칼라일은 묻고 있는 것이다. 벌거벗은 몸에 돈과 행사로 범벅이 된 옷을 입히지 마라. 주님이 지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지내도 부끄럽지 않다면(창세 2,25) 우린 비로소 신앙의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옷은 ‘텅 빈’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