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창세 9,8-15) 해설
<하느님이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신다>
제관계(祭官系) 전승에 속하는 이 대목은 구세사의 일정한 시점(詩点)에 어떤 종류의 새로운 시작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이 썩어빠진 땅(창세 6,11-12)을 홍수로써 벌하신 다음, 노아 및 그의 가족과 더불어 다시금 새로이 출발하셨다.
하느님이 노아와 맺으신 계약은 마치 하느님이 노아를 당신 자신에게 굴복시키고 예속시키시는 책벌인 양 보인다. 그리고 그 이후의 온갖 계약도 그 같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하느님이 인간과 맺는 계약은 쌍방이 동등한 자격으로 쌍무적인 의무를 가지는 그런 계약이 아니다. 그 계약은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요, 근본적으로 하느님 편에서만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의무를 떠맡으시는 식의 계약이다.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 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같은 계약이다.
그 계약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피조물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피조물로부터 하느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응답이 있기 전에 맺어진 계약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계약의 표를 세우신다.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신다. 전쟁의 무기를 쉬게 하신다. 그 무지개는 인간들보다 하느님에게 의미심장한 표시가 된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내 계약을 기억하리라.”(14-15절)
그 계약은 쌍무적인 계약이 아닐 뿐 아니라,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세워 놓은 그 표시에 당신 자신을 얽매어 놓으신다. 그 표시는 결코 걷어치울 수 없으며, 그 표시가 나타날 때마다, 하느님은 온갖 피조물들과 맺으신 당신 계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인간들이 나약하여 죄를 지어도 당신 계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대목은 무지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지 않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주려는 데 그 본래 의도가 있다. 무지개라는 물리적인 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께 대한 묘사로 소급한다. 하느님을 계약의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인간들을 위하시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우시는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시편(24) 해설
<주님, 당신 언약을 지키는 이에게는, </span>주님의 모든 길은 사랑과 진리오이다>
이 시편은 노아에게 보이셨던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표시를 기억하시도록 하느님께 애원하는 간청이다. “기억하소서, 주님, 먼 옛날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자애를!”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가지고 그 분 앞에 나설 수밖에 없고, 그분께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라고 간청할 도리 밖에 없다(7절).
하느님께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라고 무조건 달려드는 믿음의 확신이 요구된다. 주께서 몸소 그 같은 길을 지시하고 계신다. 그러한 믿음의 확신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끊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욕심을 따라 사는 생활방식을 끊어 버릴 것을 전제한다.
우리의 생활 현실과 장래와 생애를 오로지 어질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고 겸손해져야, 하느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올바르게 살 수 있게 된다.
제2독서(1베드 3,18-22) 해설
<홍수는 우리를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상징한다>
베드로 전서의 이 대목은 3,13-4,11보다 큰 부분에 속한다. 그 부분에서 베드로는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반대와 박해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를 잃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임을 당한 다음 부활하신 사건으로 전적인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에 베드로의 복음이 표명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하는 죽음(“정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과 그분의 부활(성령의 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 표명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가 세 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먼저,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우리가 구원되며,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들어 높여지는 것이 그 세 가지다.
오늘 전례의 문맥을 보아서는 첫 번째 결과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19-21절). 그리스도께서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 내려가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들어 높여지고 현양 받으시는 첫 단계로서 나타난다.
갇혀 있는 영혼들이란 죽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 대해 첫 승리를 거두셨다.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죽은 사람들의 갇혀 있는 상태가 끝이 나고 그들이 해방되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베드로는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홍수 이야기는 노아의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홍수를 거쳐야 함을 미리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세례도 홍수처럼 사람들을 죽인다(참조. 로마 6,3-5; 콜로 2,12 등).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이 홍수가 그친 다음 구원받은 것처럼, 세례의 물도 우리를 구원하는 물이 될 것이다.
세례로써 하느님이 노아와 온 피조물에게 행하신 계약과 약속이 실현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처럼 불의와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죽고 정의와 사랑이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일생의 과정과 노력과 투쟁을 뜻한다.
복음(마르 1,12-15) 해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신 다음 천사들이 시중들었다>
이 대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12-13절)은 마르코 복음서 머리말의 결어에 속한다. 그 머리말에서 세 증인들이 차례대로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먼저 예언자들(2-3절)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지칭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표현한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그리스도를 ‘나의 아들’(이스라엘의 왕, 참조. 시편 2,7).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사악처럼, 참조. 창세 22,2), ‘내 마음에 드는 아들’(종, 참조. 이사 42,1)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온갖 기대가 그리스도께 집중된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신 다음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심으로써’(13절) 우주적 평화가 이루어지리라는 메시아 시대에 관한 예언(참조. 이사 11,6-8)을 실현하신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듦으로써” 홍수를 불러온 하늘과 땅 사이의 무질서한 상태가 극복된다(참조. 창세 6,1-14).
둘째 부분(14-1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끝나고, 이제 예수님께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예수 자신이 바로 기쁜 소식이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예수 자신을 드러내 줄 뿐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이 인간들과 맺으시는 계약과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자비하심의 기쁜 소식이시다. 하느님이 노아와 맺으신 계약이 예수 안에서 완성된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은,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행하고 피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 사람들 곁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정작 오늘 이 순간, 우리 생애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결단의 순간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일생을 통한 선택과 결단의 문제이다. 삶의 의미 자체를 내건 결단의 문제이다.
묵상
때가 다 되었다.
오늘의 독서들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기쁜 소식’은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겠다. 즉 하느님이 나와 인류가 걸어가는 ‘생의 투쟁’에 마치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친구처럼 함께 하고 앞장서 가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죄악(불의와 증오와 분열)의 사슬에서 구출해 내고, 마침내는 물질의 나눔과 마음의 일치, 용서와 뉘우침, 화해와 평화로 인류를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이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에 스스로 놀라워한다. 전자공학・생명공학 등 가속적인 눈부신 발전은 스스로의 능력에 일종의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는 한편, 인류는 다름 아닌 자기의 머리와 능력의 발휘로 말미암아 생태계가 파괴된 결과의 엄청난 위협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자멸의 예감에 떨고 있다. 전쟁의 소식은 끊이지 않으며, 그에 대응하는 테러의 폭력이 줄을 잇고 있다.
시급한 연대의식과 결속
하느님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역겨워하고 홍수로써 멸하신 것처럼, 오늘의 인류를 자멸하도록 버려두실 것인가? 그 대답은 “우리가 하기 나름에 달렸다.”는 한마디뿐이다. 우리 각자가 ‘개인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각 나라가 ‘국가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는 가까운 장래에 자멸을 면치 못한다.
인류는 근본적인 연대의식에 한시 바삐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는 근거는 인간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을 똑같은 하느님 자녀와 형제자매로 대우해야 하는 데 있다. 이기주의는 실상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허상일 따름으로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형제들을 해치고 파괴하며 분열과 투쟁을 일으킨다. 합심하고 뭉치고 건설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 한 가지밖에 없다.
인류가 공동체 의식으로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순서는 가장 먼저 각자 ‘나 자신의 이기주의’를 벗어 던짐과 동시에, ‘집단적 내지 국가적 이기주의’를 청산시키는 일에 몸 바치는 일이다. 그 밖에 입으로 떠들어대는 것만으로는 가식이요, 행동과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다. 나의 양심과 마음과 선택이 그 같은 공동체 의식에 철두철미 부합하지 않고서는 거기서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개인과 집단이 다른 사람과 다른 집단을 외면하고 그 희생 위에서 자기만의 욕심을 채워서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다. 행복과 구원이란 마음의 행복과 구원이라야 참된 것이고, 마음의 행복이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음이 통해야만 얻어진다. 인류가 구원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마음이 서로 통하는 행복을 누릴 때에 성취된다.
나만 기름지게 먹고 따뜻하게 잠자고, 내 나라만 더욱 부강해지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무리 번영하고 발전한다 해도, 그 밖의 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헐벗고 떨고 있을 경우, 그런 상태는 그 허전하고 허망한 소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되고, 다수 사람들에게는 비참과 불행이 되며, 그 결과는 증오와 분열과 학살과 폭력이며 전쟁과 멸망으로 치닫는 꼴이 되고 만다.
마음의 일치와 행복은 나눔으로 표현되고 이루어진다. 나눔이라는 행위를 불러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똑같은 한 자녀요 형제”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러한 공동체 의식으로 시급히 깨어나야 나와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다.
사순 제1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창세 9,8-15)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주님께서 맺어주신 계약>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시편(24)
주님, 당신 언약을 지키는 이에게는,
주님의 모든 길은 사랑과 진리오이다
제2독서(1베드 3,18-22)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마르 1,12-15)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신 다음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