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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사순 제2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8-02-23 19:59:40
  • 수정 2018-02-23 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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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창세 22,1-2.9ㄱ.10-13.15-18) 해설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창세기의 이 대목을 읽노라면 언뜻 와 닿는 느낌이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당시 다른 종교의 신들과 판이하게 다르시다는 사실을 단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맏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가 그의 충성을 시험하신 다음 이사악을 구출하신 사실로써 하느님은 살리는 하느님이지 죽이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단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처럼 단순한 해석은 너무도 겉핥기식이고 단편적이다. 좀 더 깊은 뜻을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시련을 안겨 주고 시험을 치르게 하신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이미 매우 늙은 다음 기적적으로 태어난 맏아들 이사악에게서 그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사악에게 자기네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으로, 하느님이 자연적으로 불가능할 때 오직 당신 능력으로 태어나게 하신 맏아들 이사악을 당신께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오로지 하느님 당신 한 분께만 희망을 걸어야한다는 절대적이고 철저한 요구였다. 하느님이 당신 약속에 따라 태어나게 하신 이사악마저도 궁극적인 희망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분뿐이신 하느님 말고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참된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같은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참조. 창세 12,4),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와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히브 11,17-19)


외아들 이사악까지 하느님께 바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지녀야 할 믿음과 희망이었고, 죽임을 당한 다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실증해 보이신 믿음과 희망이었다. 하느님 앞에 선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따라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를 인생의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한 분께 자기 전 존재의 성취를 내걸고 철저히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한 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똑같은 내 형제자매로서) 존경하고 위해 주는 데 몸 바치도록 요구받고 있다.


시편(115) 해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저승의 공포가 나를 덮쳐 내가 고난과 근심에 사로잡혔을 때”(3절), 하느님은 내가 ”주님 앞에서 걸어가도록”(9절) 해 주신다. “당신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의 눈에는 소중하므로”(15절), 인간들끼리 서로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합심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기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음이 가장 고귀한 가치이다. 인간의 믿음과 희망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하느님의 ‘종’인 인간들은 그분의 법률과 계명에 따라 모든 인간을 친 형제자매로 맞아들여야만 하느님 안에서 자기의 진정한 성취(인생의 성공)를 이루며 하느님께 끝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17-19절).


제2독서(로마 8,31ㄴ-34) 해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한 이 찬미가는 7장과 8장을 결론짓는다. 7장과 8장에서 바오로는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을 남발한 나머지 생겨난 형식적인 율법주의가 초래하는 ‘저주’를 성령으로부터 비롯되는 ‘축복 및 생명’과 대조시킨다.


성령의 활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관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신뢰심을 가지고 부활을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한편 성령의 활동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수난에도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을 진정 하느님의 자녀(나의 친 형제자매)로 위해주려다가 당하는 고통과 수난은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확인케 해 주는 증거요, 무너질 수 없는 우리의 희망이 뿌리내리는 터전이다(18-30절).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한 이 찬미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고 우리를 적으로 삼지 않으시는 마당에, 감히 그 누가 있어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몸소 당신 몸으로 우리가 받을 책벌을 받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합심하게 하려고) 죽기까지 하신 마당에, 감히 그 누가 있어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자기부터 회개하고 서로 용서하고 합심하려고 우리가 노력하는 마당에, 감히 그 누가 있어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하느님의 사업,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하려는 우리 열정에 대적할 자 그 누구인가?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우리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복음(마르 9,1-9) 해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마르코는 자기 복음서 제1부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시다.”(참조. 마르 1,1과 8,29)라고 고백하도록 한다. ‘십자가의 길’이라는 주제에 집중된 제2부에서 마르코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 모시도록 인도한다(참조. 마르 9,7과 15,39).


예수님의 변모(모습을 변하심)에 대한 이야기는 제2부의 입문에 해당한다. 마르코는 여기에서 자기가 독자들을 인도해 가려는 종점을 미리 밝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평범하지 않은 행로는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고 외친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이끌어내고야 마는 행로였음을 미리 밝힌다.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고 ‘엘리야와 모세’가 그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겁에 질린다(마태오 복음에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들이 겁에 질렸다고 쓰여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엘리야와 모세’가 율법과 예언자들의 대표로서 예수님의 옆에 있었다기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들로서 예수님의 옆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참조. 신명 18,15; 말라 3,1.23).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께서 오실 것을 예고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주님이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말라 3,23)이 도래했다고 여겨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르코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 왕(시편 2,7 참조) 및 이사악(참조. 창세 22,2)에 견준다.


이 설화가 뜻하는 의미는 이렇다. 구약이 예고한 메시아, 다윗의 자손 왕은 다름 아닌 예수이심을 독자들에게 깨우치려 하고 있다. 비록 수난 받는 비참한 모습일지라도 그는 다름 아닌 메시아이고, 숨겨진 예수님의 영광스런 본모습이 제자들에게 드러난 것이다. 파스카(건너감, 부활)의 영광을 미리 조금 맛본 것이다(참조. 9-10절). 십자가 처형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이면에 숨겨진 영광스런 모습이 잠깐 빛난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당신 지상 생애가 지닌 궁극적인 의미를 언뜻 열어 보인 사건이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회개와 용서,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의 행로는 십자가의 형극에 이를지라도, 그 인생길의 보배스런 참모습이 예수님의 변모에서 빛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이다(9-10절). 예수님께서 과연 누구이신지를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를 다 마치시기까지는 그 정체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그분 존재의 참모습은 기어이 드러나야 했다(참조. 필리 2,8). 우리도 그리스도인인 척 자부하고,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척 으스대기 이전에 외롭고 가난한 대중을 구출해 내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가는 형극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참되고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하느님 안에 있는 가치이고 하느님이 부여하시는 가치일 따름이다.


묵상


파악하기 힘든 친구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 전언의 핵심이자 계시의 기본 명제다. 성경 안에서 직설적인 교리를 찾아내려는 것은 헛수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성경은 교리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가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책이지, 이론적인 가르침을 나열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고,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증거한다. 인간을 찾아 나서고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우정과 계약의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혼자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만 하지 않으신다. 인간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으신 하느님이시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반대급부로 인간에게서 조건 없는 응답을 요구하신다. 그분이 먼저 인간을 선택하셨으나, 인간 편에서도 당신을 선택해 주시기를 바라신다. 다른 무엇이나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선택하기를 바라며 당신의 사랑에 충실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분의 판단기준은 흔히 우리의 판단기준과 딴판이고, 그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분과 우정을 맺는 일도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자,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예,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한다. 이렇게 단순한 태도가 성조 아브라함의 생애를 일관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종이다. 항시 하느님께 순종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친구’였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늘그막에 하느님의 능력으로 얻은 이사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 아들에게 아브라함의 온 기대와 장래가 걸려 있었다. 하느님의 축복이 이사악에게 내려 후손들에게 한없이 이어지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렇게 순탄하고 쉽고 평온하게 가꾸어질 일이 아니었다. 혹독한 시련으로 달구어지고 성숙되어야 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절대적으로 온전히 신뢰하도록 요청받는다. 온갖 인간적 계산이나 예측과 빗나가는 요청을 받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약속을 눈감고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이었다. 설명도 없고 지체할 여유도 주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고뇌를 뿌리치고 순종한다. 그 명령이 인간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도 순종한다. 하느님과 입씨름을 하지 않는다. 조건 없이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총애와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전혀 모른 채 눈감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다. 


무릇 우리의 믿음(하느님께 대한 신뢰)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닮아야 한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고 내맡긴 연후에야 하느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가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모든 사람을 형제로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요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그 후예답게 갖은 역경과 난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여 용감하게 매진할 수 있다. 


유별난 사랑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은 마지막에 건져 주셨지만, 당신 외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죽음을 맛보게 버려두셨다. 수많은 대중이 겪는 고통과 죽임을 그들과 더불어 당신 외아들이 몸으로 겪도록 내버려두셨다.


그것은 그들을 비참의 수렁에서 구출해 내기 위함이며, 동시에 불의를 일삼는 소수의 사람들의 모진 마음의 경향을 돌이키고 뉘우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과연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를 따라 예수처럼 예수와 한 몸 되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하느님은 칠흑같이 어두운 죽음에 부치신다. 그 죽음의 행진 이면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이 간혹 잠깐씩 우리 마음을 비출지라도, 죽임을 당한 다음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결정적으로 동참하기까지는 결코 자부하거나 안심할 수 없음이 ‘그리스도인의 구원하는 생애의 비밀’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은 수많은 민중이 혹사당하며 수십 년씩 걸려 세워 놓은 화려한 유적들이 아니다. 그 ‘영광의 비밀’은 엉뚱하게도 혹사당하던 민중과 민중의 후예들 일반의 마음속에 널리 일깨워지고 있는 존엄한 인간(하느님의 똑같은 자녀)으로서의 자각이다. 바야흐로 하느님의 승리(인류의 화합과 합심)는 강력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은밀히 실현되어 가고 있다.




사순 제2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창세 22,1-2.9ㄱ.10-13.15-18)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랐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시편(115)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


제2독서(로마 8,31ㄴ-34)

<하느님이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셨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십니다.


복음(마르 9,1-9)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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