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 우물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야곱이 준 우물은 없다. 우물이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물이라고 하면 사막에서 ‘물이 나오는 바위’와 관련시켰다. 모세가 사막에서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쳐 물을 샘솟게 했다. (민수 21:16-18)
물이 터져 나오는 바위라고 하면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고 여기서 우물은 그 뜻을 가진다. 즉, 율법에 생명의 샘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야곱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이 준 우물, 즉 율법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모른다. 율법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이 같은 말은, 율법에서 나오는 우물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성령’이다. 사람을 새로 나게 하는 성령, 위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을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하면서 예수에게 요청한다. 이제야 여인은 예수를 유대인으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따르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런 것에 매이지 않고 새로 태어나게 된 여인임을 보여준다.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본래 이 남편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이야기다. 즉, 바알신에 대한 이야기다. 호세아 예언서에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길 때, 바람을 피우는 창녀로 표현했다. 이 여인이 다섯 남자와 살았다는 것은 호세아 예언서의 내용을 빗댄 것이다. 참된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인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예배드리는 일로만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예배드리는 일로 끝난다면 이것은 율법신앙이다.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어떤 성전, 건물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을 대신하는 분이시다. 가장 중요한 예배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를 모신 형제들이다.
율법의 하느님은 사람들을 차별하고 불평들을 조장하지만 예수의 하느님은 차별이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무시 하지 않으며 사람 사이에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진정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사람을 충실하게 사랑할 때, 영적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다.(요한 4,23)
[신부열강]은 ‘소리’로 듣는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업로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