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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8-03-23 2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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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50,4-7) 해설

<수난하시는 종은 박해자들에게 반항하지 않고 당신을 내맡기신다>


종에 관한 세 번째 노래인 이 대목은 다른 두 노래와 차이점이 있다. 이 대목에 나오는 인물은 분명히 ‘종’이지만(참조. 10절), 그 종이 보편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대목은 제2이사야의 ‘종’에 관한 ‘고백’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서 이 대목도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예고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첫 언명(言明)은 ‘제자’로서 예언자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달자로서 전언(傳言: 메시지)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느님이 그의 귀를 열어 주고, 그에게 당신 말씀을 내려, 자기 자신의 말을 아무것도 덧붙임이 없이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예언자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분명히 하셨다.


종에 관한 둘째 노래에서 어렴풋하게 암시된 다른 측면 하나가 셋째 노래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가 폭행을 당한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단순히 예언자가 당하는 몰이해와 박해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수난이 예언자의 사명에 속하고, 실상 그 자신이 이 박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올바름이 가려질 것을 알면서 “차돌처럼 얼굴빛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수난의 의미는 종에 관한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에 가서야 충분하게 설명할 것이다.


종이 받은 소명의 이 같은 측면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것으로 취하고, 당신 수난에서 재현하셨다(참조. 마르 8,31; 9,31; 10,33이하).


시편(21) 해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서 이 시편도 ‘종’이 받을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되고, 그 인물 안에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수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당신 안에 수렴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백성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따라 수난의 길을 통과해야 하는 운명이다.


제2독서(필리 2,6-11) 해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셨고, 그러므로 하느님이 그분을 들어 높이셨다>


그리스도교가 옛날부터 불러온 이 찬미가는(아마 바오로가 몸소 쓴 것이리라.) 그리스도께서 이사 52-53에 나오는 수난하는 종과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병행구들을 찾아보자. ‘자기 자신을 버렸다.’(7절: 이사 52,12), ‘종의 신분’(7절: 이사 52,13),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다.’(7절: 이사 52,14), ‘죽기까지 순종하시다.’(8절: 이사 53,12), ‘하느님이 그를 들어 높이셨다.’(9절: 이사 52,13)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돋보인다.


- 여기서는 단순히 하느님이 ‘종’이 되라고 소명을 내리신 인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니고 계신 분’, 최종적으로 ‘주님’이라 불리시는 분, 모든 히브리인들이 ‘하느님’께 붙여 드리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가지시는 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종’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사 53,10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하느님 홀로 ‘종’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 없는 분만이 제물이 될 수 있는 속죄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죄가 없고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2코린 5,21; 요한 8,46).


마지막으로 10-11절에서 이사 45,23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즉 주님)라는 대명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님’으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심으로써 ‘주 하느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섬기러 오신 ‘주님’이시다(참조. 마르 10,45).


복음(마르 14,1-15,47 또는 15,1-39) 해설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 이야기>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수난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당장 그 안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수난기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첫째 부분은 둘째 부분에 대한 예고가 된다.


1. 마르 14,1-21. 이 부분의 구조는 동심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ㄱ:1-2절; ㄴ:3-9절; ㄷ:10-11절; ㄴ′:12-16절; ㄱ′:17-21절). 이 부분의 구조는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ㄷ), 예수님의 죽음이 종교 지도자들이 꾀한 음모로 준비되고(ㄱ), 예수님 자신에게서 예고된다(ㄱ′). 그 같은 구조 속에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사건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들어 있고(ㄴ), 파스카 식사 준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고가 된다(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실현된 우리 구원의 한가운데 유다의 배신이 도사리고 있다.


2.  마르 14,22-16,8. 둘째 부분의 구조도 동심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ㄱ. 14,22-25 : 성찬례를 제정함 ; 빵과 포도주가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ㄴ. 14,26-31 :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ㄷ. 14,32-52 : 제자들이 모조리 도망친다.


ㄹ. 14,53-65 :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명백히 선언하신다. 그러자 대사제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자기 옷을 찢는다. 


ㅁ. 14,66-72 : 예수님 앞에서 자신했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ㅂ. 15,1-15 : 유다인들의 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ㅅ. 15,16-20ㄱ : 유다인들의 왕에게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운다.


ㅂ‘.  15,20ㄴ-27 : 유다인들의 왕에 대한 사형 집행


ㅁ‘.  15,33-32: 세 번에 걸쳐 그리스도를 조롱한다.


ㄹ‘ 15,33-39: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방인은 예수님께서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다.


ㄷ‘. 15,40-41: 부인들이 십자가 밑에 서 있다(그녀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긴 착실한 제자들이었다.).


ㄴ‘. 15-42-47: 예수님의 죽음은 새로운 제자들을 일으킨다.


ㄱ‘. 16,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참으로 다양한 신학 내용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리스도와 제자들, 성찬례와 예수님, 이스라엘 사회 구조와 관계 그리고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는 사실에 관한 신학이 그 속에 들어 있다. ㄱ-ㄱ´ 은 성찬례(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를 나누어 받은 사람도 자기 자신의 살과 피까지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성체성사요 미사성제이다.)가 그리스도께서 오늘 당신 교회와 인류 안에 살아계시는 장소요 방법임을 드러낸다. ㄷ-ㄷ´은 참된 제자는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가시관을 쓰신 분(ㅅ)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요(ㄹ-ㄹ´), 구약의 기다림을 채워 주시는 메시아요 유다인들의 왕이시다(ㅂ-ㅅ-ㅂ´).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려는 마르코의 시도가 결론을 맺는다.). ㅁ-ㅁ´는 이방인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써 레위의 사제직을 종식시켰으며(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었다.), 이방인들도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게 하셨다(성전의 휘장도 찢어졌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넘겨주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게 되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0,4-7)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시편(21)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제2독서(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형제 여러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수난 복음(마르 15,1-39)

마르코에 의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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