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한국교회가 전근대적 권위주의 체제를 과도하게 고수하고 있음을 먼저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 서구교회 구조는 지난 시기 제국의 체제 안에서 가르치고 성화하며, 통치하는 권한을 각 지역 교회 교구장 주교가 독점해 왔다. 그리고 일반 신부들에게 제한된 형태로 권한이 위임되는 가운데 상명하달식 교회운영이 대세였다. 교회 성원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은 이 교계제도 구조 안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른 어느 지역 교회보다 교계제도 중심적 교회 면모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제들은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에 조직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현대사회에서의 ‘교회의 순명’은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제직분을 잘 유지하거나 인사발령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의 뜻보다 윗분들의 뜻을 잘 따라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복음화 되어야 할 외부사회를 향하여 민주화와 정의사회 실현을 강력히 촉구하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의 민주화와 정의구현은 요원하다. 정의구현 사제단의 일원들도 웬만하면 자기 교구의 문제는 말하지 않고 활동한다.
사제들은 강정마을, 쌍용자동차, 콜트악기, 밀양송전탑 등 다양한 현안을 담고 있는 시국미사를 통해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외쳤건만 정작 자기 집안의 정의와 평화는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다. 우리 안의 강정, 쌍용, 콜트, 밀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교구의 운명 내지 진로를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가진 교구장에게 그 누구도 쉽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주교의 임명 과정에서 해당 교구의 하느님 백성들은 제도적으로 소외되어 의견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지금의 모순된 구조는 오히려 반민주적이며 반복음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교회 안에는 집단적 이기주의가 공동체 안에 뿌리 깊이 정착되어 있음을 바로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는 신자들을 분리시키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이른바, ‘본당중심’의 폐쇄적 구조와 ‘교구중심’의 폐쇄적 구조가 교회 공동체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다. 교구, 본당, 수도회, 신심단체 등은 각기 자신의 존립과 규모 확장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을 뿐, 다른 개인이나 집단들을 신뢰하고 수용하며, 협조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설본당이 생겨나면 모 본당과 신설본당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 또 경험 해보았다.
이러한 본당 구조 안에서의 갈등은 통상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 하거나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발생한다. 이렇듯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표아래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봉사하기 때문에 이러한 봉사 행위도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가 꾸준히 전개하는 제반 활동이 교세확장, 신자 수 증가를 일차적인 목표로 하는 한, 진정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자기희생적 공동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괄목할만한 외적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이에 상응하는 영적 성숙과 성장을 만들어 내고 있지 못함을 지적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오늘날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촉구한 토착화, 쇄신과 적응의 과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1962년 교회법적으로 완전한 자치교회로 발돋움하여 50여 년이나 경과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서구교회를 모방하는 면모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신학사상, 교리교육, 전례양식, 신심운동, 영성생활, 그리고 건축양식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방적으로 서구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실정이다.
미성숙의 문제와 맞물려 한국교회가 ‘지금 여기’ 다분히 세속화 (secularization)되어 있어 지상의 하느님 나라로서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음 또한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속주의적 생활방식과 사고에 순응하게 되면서 오히려 사회의 세속화 속도보다 빨라지고, 교회는 또 하나의 세속화된 세상이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못한 껍데기 교회가 되어 버렸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실망하여 발길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는 ‘냉담자’라고 부르며 단죄한다. 이것이 요즈음 교회 운영의 현실이다.
전례는 경건함을 잃어가고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버렸고, 지나치게 많은 모임과 행사 등은 교회가 친목을 위한 사교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 본당사목은 음주가무의 행사가 되어버리고 ‘술’이 없이는 사목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린 운영방식과 형태들,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셔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어울리지 못하는 사목자가 되어 버린다면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복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묵주기도와 경건한 순교자에 대한 자료발표로 시작된 성지순례는, 어느새 돌아오는 길이 되면 버스 안에서 다 같이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 이때,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그 분위기를 깨지 말고 같이 어울려 흔들어 주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다.
이러한 교회의 미숙성과 비지성적 풍토, 그리고 심각한 세속화문제가 ‘새 복음화’에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전 생활 영역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역사적 대전환기에 교회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현실 판단능력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부재는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도 올바로 내올 수 없다.
이제 출발합시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뒷받침해 줄 신앙 공동체도 없고, 삶의 의미와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기쁨』 49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