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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여러분, 정말 안녕하신가요?
  • 임 루피노
  • 등록 2015-06-08 10:29:50
  • 수정 2015-06-08 13: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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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메르스 난리통에 안녕하신지요? 사실 메르스만이 아니라, 공안검사요 대기업봐주기 검사 출신의 총리임명, 성완종씨 뇌물수수자 명단, 미국의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탄저균실험, 그리고 세월호특별법 무력화를 위해 만들고 날치기식으로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직접 인준/선포한 쓰레기 시행령까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온통 난리법석통으로 숨 막히게 하는 사건들이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명 영화배우, 연예인들의 연애기사나 결혼기사들이 강렬한 향신료처럼 우리 지각을 자극하고, 공동선을 위한 모든 업무에 무능해지는 일에 창조적으로 최고의 유능함을 보이는 정부와 대통령은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며,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쓰기만 하면서 거짓과 왜곡을 일삼는 언론기업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있습니다.


형제자매여러분, 그리고 시민여러분, 이런 난리통에 정말 안녕하신지요?


세월호 참사, 세월호 학살 이후에,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는 어쩌면 탈색된 옷감처럼 그 의미가 바래버린 것만 같습니다. 세월호 아이들 초상화를 대하면서, 어찌 멀쩡한 얼굴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 광장에서 취하는 몸짓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에 그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안녕할 수가 없고, 또 안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닌데요. 곧, “물타기”와 “사기극”입니다. 둘 다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어떤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기교나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죠. 기교와 지식은 기성 종교인들이 예수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체험했던 감동, 우리가 예수를 대면할 때 경험하게 되는 감동은 그런 게 아닙니다. 기교와 그저 많은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예수와 조우하면서 체험하는 감동은 한 인간과 그의 세계를 통째로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그런 예기치 않았던 변화의 서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기성 종교인들, 특히 종교체제 안에서 기득권, 결정하고 해석하는 특권을 가진 이들, 그리고 특히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땀 흘릴 일이 없는 성직자들은 그런 놀라운 변화의 사건 앞에서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물타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만날 생각은 않고, “당신이 이렇게 하는데, 그럴 권한은 누구에게 받았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예수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는 않고, “어떤 여자가 이래저래 해서 일곱 남자와 결혼했다가 죽었는데, 그녀가 다시 살아나게 된다면 어찌 되겠소?”라고 물타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당연히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 슬픈 일인데, “하느님”을 가장 많이 말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고 선포하는 직업적 종교인들이, “하느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곧 “변화”입니다. “변화”는 하느님이 머무시는 자리, 하느님을 겨우 숨통 트이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전문가들”이 겨우 입을 열고 숨을 쉬려고 하는 하느님 입 속에 켑사이신 액이 가득한 주전자를 들이 붓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경이로운 종교의 “물타기” 수법입니다. 종교 자신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도 변화되기를 원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그들이 변화되는 것을 막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과 그것을 유지시키는 ‘교황님이 다녀가셨는데 왜 한국 교회는 바뀌지 않느냐?’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정도로 교회가 바뀔 것 같으면, 우리 교회는 수도 없이 탈바꿈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 받고 죽음을 겪으셨는데도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바뀌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 바꾸라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려면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해야만 사랑의 교회가 됩니다. 시스템을 강화합니다. 정말 경이롭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학교에서 저에게 신론/삼위일체론을 가르쳐주신, 그러니까 저에게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조규만 주교님께서 지난 2월1일 서울교구주보에 쓰신 복음묵상의 일부입니다. 교종께서 다녀가셨는데, 그 메시지와 실천을 통해서 드러난 변화의 신비, 즉 하느님의 신비에 주목하기보다, “당신들도 죄인이니 당신들 자신부터 바뀌어야 해.”라는 말로, 거기에 물타기를 하는 것으로 제 귀엔 들립니다.


모든 변화의 시도는 역설적이고 위선적이게도 이렇듯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잠잠해지게 되고, 결국 우리에게는 그 어떤 현실적인 시도도 할 근거가 없어지게 됩니다. 무력하게 되고 맙니다.


종교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물타기는 그들이 종교에서 배운 기술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 작동한 공적 국가조직들이었습니다. 또 비슷한 방식으로 조작/날조된 간첩사건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이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무수한 정보경찰들이 곳곳에 배치되었고,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사찰 대상과 공공의 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군피아들의 어마어마한 방산비리와, 그리스도교 신자도 여러 명이 포함된 정치 뇌물 수리자들 명단과, 미국의 오만한 탄저균 실험에 이어서, 메르스 파동이 일어나고, 모든 것은 또 덮여지고,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다면서 다시 외유를 떠납니다.


민중이 요구하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진실”에 언제나 물을 타고 또 아주 많이 또 자주 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 모두가 익사할 지경입니다.


벌건 대낮에 이렇듯 종횡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기극을 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대국민 정신착란증 유발 프로젝트는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자극을 지속적으로, 우리가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리려고 하면, 주고 또 주는 식으로 정상적 인지기능, 판단기능을 마비시키는 프로젝트 말입니다.


도박판에서 거짓 기술을 써서 사기를 치면, 구속되어 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기극의 규모가 하나의 사회와 국가의 차원이 되면, 집단적인 인지기능의 장애를 일으킵니다. 언론기업과 다양한 미디어, 각종 공공기관, 거대 자본의 기업, 경찰과 군대와 정보부조직, 대학 등 교육기관, 보수화된 정치조직 등이 전 방위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거짓을 생산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폭력을 행사하면, 그렇게 큰 스케일의 사기극은 범부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다들 “설마 국가기관이 그럴 리가 있나” 라고 하면서, 시선을 자기 일상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런 대중의 생리 때문에, 대개의 사기단은 사기의 규모를 더 키우고, 더욱 대범한 방식으로, 더욱 흉악한 종류의 사기를 실행에 옮깁니다. 죄질이 더 나쁘고 규모가 더 클수록 그에 대한 대중의 판단력과 식별력이 마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사회를 “광기의 사회”, “야만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광기와 야만의 최고봉은 바로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그런 광기의 전쟁, 세계적 규모의 사기극을 저 제주도로부터 만주에 이르기까지 뼈아프게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의 수많은 미군기지에서, 미 해군을 위한 군항이 건설 중인 제주 강정에서, 진도 앞바다에서, 밀양에서, 무수한 부당해고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 청년들의 삶터에서, 그리고 이 자리 광화문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물타기와 사기극 앞에서, 광기와 야만의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번 주간에 듣고 있는 이야기는 토빗서입니다. 토빗은 말하자면 제2경전의 욥이고 예수입니다. “무죄한 이가 사회에서 악한 대접을 받기만 할 때, 그의 선한 실천은 하느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도 똑같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전하는데도,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의 본래 의미를 되찾으려고 하는데도, 이 사회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고 십자가의 희생양이 되어만 갈 때,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형제자매여러분, 결국 시스템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시스템으로서의 종교와 시스템으로서의 국가는,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한 마디 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라.”,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배에서 나오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질문하지 말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 “현실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굴뚝에도, 타워크레인에도 올라가지 말고, 철거당해도 주거권을 요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전쟁 준비를 국민 세금으로 하면서 전쟁의 위험성이 커가도, 가만히 있어라.”

“여러 차례 수명 연장을 한 원자로에 심각한 사고의 위험이 도를 넘어도, 가만히 있어라.”

“삶이 파탄 나고, 하루에 수십 명의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가만히 있어라.”

“진실을 더 알려고 하지 말고,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사기극을 벌이는지 알려고 하지 말고, 생명과 평화가 그렇게 짓밟혀도 왜 그런지 알려고 하지 말고, 제발,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여러분,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 광기의 우물물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마시고, 같은 광기에 취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이유는, 자본과 권력의 시스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연대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서의 예수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연대하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연대하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라.” “우리가 작고 약함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라.” “우리에게 부족함과 결함이 있음에도, 가난한 이로서, 연대하라.”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난한 피조물들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연대하라.”


하느님은 그 연대 안에 살아계시고, 하느님 나라는 거기에 있다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인식을 더 널리 나누고, 연대의 폭을 넓히고, 현장에서 만나고, 가난한 이의 생명과 우리 모두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하느님이심을 실천으로 선포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덧붙이는 글

임 루피노 : 작은형제회 소속으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수도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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