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善爲士者 고지선위사자 微妙玄通 미묘현통 深不可識 심불가夫惟不可識 부유불가식 故講爲之容 고강위지용 豫兮若冬涉川 예혜약동섭천 猶兮若畏四隣 유혜약외사린 儼兮其若客 엄혜 기약객 渙兮若氷之將釋 환혜약빙지장석 敦兮其若樸 돈혜기약박 曠兮其若谷 광혜기약곡 渾兮其若濁 혼혜기약탁 孰能濁 숙능탁 以靜之徐淸 이정지서청 孰能安 숙능안 以動之徐生 이동지서생 保此道者 보차도자 不欲盈 불욕영 夫惟不盈 부유불영 故能敝不新成 고능폐불신성
道에 훌륭한 이들은 미묘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닭에 억지로 모양을 그려보면 신중히 겨울에 개울을 건너는 것과 같고, 삼가 주위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고 의젓하여 마치 손님과 같고 부드러워 얼음이 녹으려는 것과 같고, 투박하여 마치 통나무와 같고 품이 넓어서 골짜기 같으며,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서 흐릿함과 같으니라. 그 누가 탁한 것과 어울리면서 고요함으로써 그것을 천천히 맑게 해 줄 수 있으며, 그 누가 가만히 있으면서 움직임으로써 그것을 천천히 태어나게 하겠느냐? 이 道를 지닌 자는 스스로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무릇 스스로 차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낡지 않으면서 새 것을 만들지도 않느니라.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찬양이 아니라 감탄이다.
노자15장은 읽고 읽어도 마치 ‘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과 같다. 성경에서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2,7)는 생명체는 분명 ‘그 사람’이다. 때로는 느린 듯, 약한 듯,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었다가 이내 다시 일어나며 자신에게 다가온 것을 그가 그의 자서전에 밝힌 것처럼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 운명 앞에서 순명의 무릎 꿇음을 한 천주교인 문재인 디모테오.
노자는 도道의 모양을 통나무와 같다고 여러 곳에서 말했다. 다듬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통나무에서 수많은 모양과 쓸모가 나오는 원천이 되듯이 그것은 모든 것의 바탕이며 무색이며 원천이다. 한마디로 무無이며 물水과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현 시대의 한민족에게는 그런 통나무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존재는 지난겨울 거리의 촛불들의 기도에 들어 있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그들의 고통을 알고’(탈출3,7)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창세1,1) 하였다.
한 사람으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검은 그림자, 흰 그림자를 포함해 나이테를 그려가는 동안 숱한 천주교인이 나왔다. 문재인 디모테오 한 사람으로 충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국천주교회는 이제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쳐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보라. 민중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쳐도 용산에서는 철거민들이 불길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고, 쌍용자동차 옥상에서는 백주대낮에 노동자들이 개 패듯 폭행을 당하고, 85호 크레인을 비롯해 숱한 굴뚝마다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되었으며 끝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세월호에서 외쳐도 7시간동안 귀도 눈도 입도 막은 오리무중의 세상이 이어졌다. 이제 변화의 바람,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이 땅에 “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하려한다. 비바람에 맞선 그를 보호하고, 상처투성이인 그를 감싸주고, 악타구니 모멸 앞에 선 그를 보호하는 것은 눈귀코를 가진 이들의 몫이다.
독일이 통일될 무렵 록그룹 스콜피언스가 부른 < Wind of Change >란 노래가 있었다. 노래의 가사 말을 다시 되새긴다. “상상이나 했었나요. 우리가 형제처럼 이렇게 가까워질 줄? 우리의 미래가 바람에 실려 와요.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답니다. 변화의 바람과 함께 말이에요. 우리 미래의 아이들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맘껏 꿈꿀 수 있는 그 곳으로 말이에요. 변화의 바람이 시간을 타고서 불어오고 있어요.”(부분 발췌)
노동절을 맞는 오늘
문재인 디모테오는 끝내 채우려 하지 않는다. 노자 3장에 나온 말씀처럼 “도는 비어 있음으로 작용하여 언제나 차지 않는다. 道沖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영)” 자신에게 1에서 100까지의 기회가 열려 있다 해도 60이거나 70쯤에서 멈출 수 있는 것은 용기이며 동시에 다짐이다. 세상 전부 나의 몫이 아니라는 그런 마음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많은 열매를 문재인 디모테오 혼자 독차지 하려 욕심내지 않고 있음은 분명 그의 지혜로움이다.
채우지 않는 것은 비어있는 것의 시작이다. ‘텅 빈 충만’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느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문재인 디모테오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라고 했듯이 그는 채우지 않는 일을 쉼 없이 하고 있다. 언젠가 그에게도 쉼이 찾아오겠지만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그의 숨찬 노동 앞에 맞이하는 오늘, 노동절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한 점을 찍으면
비로소 걸어갈 방향이 보이고
한 사람이 나타나면
비로소 살아갈 삶이 보인다
전쟁이 끝났다는 말
평화가 시작되는 말
형제가 기다린다는 말
오고 갈 수 있다는 말
운명처럼 나타나
숙명처럼 함께 갈
여기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