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上下知有之 태상하지유지 其次親之譽之 기차친지예지 其次畏之 기차외지 其次侮之 기차모지 故信不足焉 고신부족언 有不信 유불신 猶兮其貴言 유혜기귀언 功成事遂 공성사수 百姓皆曰我自然 백성개왈아자연
가장 높은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가 있는 것만 알고, 그 다음 지도자는 가까이 여겨 받들고, 그 다음 지도자는 두려워하고, 그 다음 지도자는 경멸한다. 그러므로 성실함이 모자라면 아랫사람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삼가 조심하여 말의 값을 높이고, 공을 이루어 일을 마치되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저절로 그리 되었다고 한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지도자’라는 자리
노자가 말하는 백성, 즉 만민에게 경멸을 당하다 쫓겨난 지도자를 우리는 얼마 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실시간 라이브로 보았다. 지도자란 자리를 맡는 일은 두렵고 두려운 일이다. 노자에게는 후대 사람이지만 우리에게는 까마득한 사람인 맹자가 지닌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는 백성이 중심이고 근본이 되는 민본사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생각은 조선 후기까지도 불온시 되었고 심지어 그의 탕론蕩論은 금서였다. 당연히 과거시험에서 이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불가했다.
어느 날 주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왕이 걸왕을 내칠 수 있습니까?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주지육림으로 유명했던 하나라의 걸왕을 폐하고 탕왕이 은나라를 새롭게 연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맹자는 “인仁을 저버린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저버린 자를 잔殘이라 하고, 인과 의, 두 가지를 모두 저버린 사람을 일부一夫라고 한다. 나는 일부一夫인 주紂를 베였다는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주紂는 걸왕의 이름이다. 임금을 바꾸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가 <탕론>이다.
북에서 만난 사람
10여 년 전에 평양을 간 적이 있었다. 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평양의 장충성당 안에 있었던 콩우유공장 모니터링을 위한 활동이 주목적이었다. 콩우유는 흔히 말하는 ‘두유’를 북녘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 일행을 데리고 다녔던 버스기사는 나이가 제법 들은 일꾼이었다. 간간히 쉬는 동안 물어보니 부인은 일찍 사별했고 큰딸은 유치원 교사, 둘째는 간호학교 학생이었다.
더 이상 깊은 사정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어디서나 ‘지겨운 밥벌이’를 살아내는 사람살이의 신산스러움은 매한가지였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탓인지 나이보다 훨씬 들어 보이는 인상이어서 방북기간 내내 그를 ‘아바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만나고 사나흘 있다가 방북경험이 있는 선배(?)들에게 들은 바가 있어 당시 북에서 귀하게 여긴다는 준비해간 ‘살 양말’을 남들 눈을 피해 평양 어투를 흉내 내며 “아바이 동무, 딸들 드리시오” 라고 건넸다. ‘살 양말’은 여성용 스타킹을 북에서 부르는 말이다.
‘살 양말’에 미소 짓던 아바이
몇 번 사양을 하다가 그냥 딸들 주고 싶은 ‘살 양말’ 몇 장이라고 하니 쑥스럽게 웃었다. 그 역시 영락없는 딸바보 애비였다. 그 와중에 그는 내가 한 말을 교정(?)해 주었다. “동무는 자기와 엇비슷하거나 아랫사람을 칭하는 말이고 이왕지사 ‘아바이’라고 부를 때에는 동지라고 해야합니다.” 듣고 보니 그이 말이 옳았다. 북쪽사람들에게 흔히 쓰는 ‘동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 떨어져 사는 동안 나무가 제 몸에 나이테를 더해가듯 제일 가슴 아픈 일은 사용하는 언어는 같지만 용어와 낱말이 지니는 어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적, 지리적 통일이전에 다방면에서 ‘통通’할 수만 있다면 벌어진 세월을 하루아침에 메꾸어 낼 역량은 민족에게 얼마든지 있다. 암튼 ‘아바이’는 동무가 아니라 ‘동지’다.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주교는 ‘지도자’이다.
교회는 주교, 특히 교구장 주교에 의해서 모든 것이 규정지어진다. 교구 참사회의를 비롯한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가 교회와 교구를 구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구장 주교에 의해 결정되는 모든 것은 절대적이다. 그러기에 그는 분명 신자들의 ‘지도자’이다. 당연하게도 교회 바깥사람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며 여론 형성에 있어서도 ‘지도자급’으로 대우받는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나는 그냥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고 한껏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주교는 세상의 모든 주교를 합친 것 보다 더한 권능과 권위를 인정받는다. 한편에서는 그가 하고 있는 교황청의 개혁과 이미 발표된 사목권고와 회칙 등에 대하여 가재눈을 뜨고 입을 씰룩거리지만 교종 프란치스코는 노자의 표현대로 세상 만민이 ’가까이 여겨 받드는’ 인물에서 이제 그가 ‘있는 것만 아는’ 인물이 되어 마치 공기나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곁에 존재하고 있다.
오. 엑스. 퀴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 갈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손과 발을 지닌
아무 말 없음 속에 함께하는
동지로서의 교회 지도자는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