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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칼을 내려놓자 목을 베어버리는 양키 사무라이
  • 전순란
  • 등록 2018-05-25 10: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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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4일 목요일, 맑음 


시속 35Km의 기차. ‘가난하고 헐벗은 산하는 차마 보여주기 싫어 창문은 가리고, 눈감아라, 제발 우리 헐벗은 모습 보고 비웃거나 동정하는 건 더욱 싫다.’ 먼지 펄펄 날리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 자갈길을 차로 달리고 걸어서 두 시간… 배고픈 그들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핵’을 왜 핵핵거리며 만들었을까? 이라크 후세인, 리비아 카다피의 운명을 보면서 자기네를 지키는 한 가닥 희망이었으리라. 


그런데… 북한이 자기네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나밖에 없을 풍계리 핵폭탄 실험장을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폭파시키자마자 트럼프가 ‘이젠 넌 죽었다!’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 


자정을 넘기면서 나만 아니라 한반도의 남북한 겨레 모두, 아니 한겨레의 평화공존을 염원하던 전 세계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 사무라이 소설을 보면 두 무사가 싸우다 하나가 무릎을 꿇고 칼을 넘기는 순간 (의리를 중시하는 중국과 한국의 무협소설에서는 항복한 적의 목숨은 살려둔다!)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북한이 풍계리를 폭파시키자 미국의 목표는 달성되었다며 6·12회담을 엎어버린 장면이어서 양키-사무라이다운 짓이라는 장탄식이 나온다.


우리 대통령을 믿고 시작한 일련의 희망과 기쁨이 트럼프 저 한 사람의 심술과 책략으로 이렇게 망가지는 걸 보는, 지구상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으리라. ‘저들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인간들 사이에 신뢰를 사라지게 만들며, ‘미국놈들 믿지 마라!’는 말을 따라, 이것을 예상하고 김정은은 시진핑을 만나러 다녔나?


전 세계는 또다시  미국의 ‘코피작전’으로 한반도에 언제 전쟁이 일어나나 신나서 구경하는 사태로 돌변하고, 우리나라 보수언론과 보수야당은 아마도 얼쑤절쑤 춤추면서 여론반전과 정권재탈환의 황당한 꿈을 꾸는 시간으로 접어들지는 안을까?, 국민의 상심은 아랑곳 않은 채로…



나와 보스코는 완전 멘붕에 빠졌다. 오늘 밤 잠들기는 틀렸다. 희망이 컸으므로 절망도 크다. “이젠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느님!” 그분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오늘이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이었으니까 성모님의 격려를 받고, 빠끔 열려있는 뒷문을 김정은이 어떻게든 열고 들어가 활로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가 고수인가 보자. 


요즘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인간 이하로 망가져 버린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이야기를 매일 접하며 저런 이들에게는 부유함은 재앙이다. 그 대신 스스로 선택한 가난으로 타인의 가난에 동참하여 그 가난이 부끄러움이 아님을 일깨우며 사는 불교와 가톨릭 수도승들, 스스로 가난해져야 남과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며 나를 뒤돌아보기도 한다.



점심에 도메니카가 왔다. 그 동안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이 얼마나 정치적인 동물인지’, 우리 생활의 희비가 정치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그래서 올바른 정치를 하는 일이 우리개인과 국가사회의 운명을 얼마나 좌우하는지를 얘기했는데, 지금 이 시각은 국제정치에서 열강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가련한 처지를 다시 실감하는 밤이 되고 말았다.


오후에 지리산 ‘문정댐 건설 반대’ 홍보물을 만든다고 지리산환경연대 간사 이선진 씨가 강정사태 ‘구럼비: 바람이 분다’(2013), 일본군 위안부 ‘보이는 어둠’(2002), 제주 4·3 사태 ‘레드헌트’(1997) 다큐를 제작한 조성봉 감독과 채현진 씨를 데리고 휴천재에 왔다. 얼마 후 생명연대의 신임대표인 노 목사님도 와서 우리 부부와 인터뷰를 했다.



나더러 한 말씀 따로 하라고 부탁했고 “나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다.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안식은 늘 내 마음속에 자리해 왔다. 지리산의 이 자연은 우리 선조들이 함께 누린 세계였고 지금은 우리가 깃들어 살지만 언젠가 후손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주고 떠나야 한다. 내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 편리대로 파괴해서도 안 된다. 해 넘어가는 시간, 호미를 손에 들고 밭이랑에 앉아 서산의 노을을 바라보노라면 우주에 가득 찬 그분의 영이 나를 감싸고 있음이 느껴져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온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일 때 자연스럽듯, 흐르는 물을 댐으로 가두는 일은 절대 안 된다.”는 요지의 멘트를 남겼다.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앞산구경을 하다가 끼니때가 되어 급히 파스타를 해서 조감독 일행과 저녁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관련기사)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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