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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노자와 교회 : 평신도는 ‘내버린 돌’인가? 영광입니다.
  • 김유철
  • 등록 2018-06-05 11:34:32
  • 수정 2018-06-05 11: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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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學無憂 절학무우 唯之與阿 유지여아 相去幾何 상거기하 善之與惡 선지여악 相去何若 상거하약 人之所畏 인지소외 不可不畏 불가불외 荒兮其米央哉 황혜 기미앙재 衆人熙熙 중인희희 如享太牢 여향태뢰 如春登臺 여춘등대 我獨泊兮 아독박혜 其未兆 기미조 如嬰兒之未孩 여영아지미해 乘乘兮 승승혜 若無所歸 약무소귀  衆人皆有餘 중인개유여 而我獨若遺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아우인지심야재 沌沌兮 돈돈혜 俗人昭昭 속인소소 我獨若昏 아독약혼 俗人察察 속인찰찰 我獨悶悶 아독민민 澹兮其若海 담혜기약해  飂兮似無所止 요혜사무소지 衆人皆有以 중인개유이 而我獨頑且鄙 이아독완차비 我獨異於人 아독이어인 而貴求食於母 이귀구식어모 


사람들한테서 배우기를 그만두면 근심이 없다. ‘예’하고 ‘응’하고 얼마나 다르며, ‘선’과 ‘악’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랴? 황당하기가 끝이 없구나. 사람들은 밝고 즐거워 큰 잔치를 베풀고 봄 동산에 오르는 것 같은데 나는 홀로 고요하여 아직 첫 웃음을 지어보지 못한 젖먹이처럼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고 끝없이 돌아가는 모양은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넉넉한데 나는 홀로 아무 것도 없다. 나야말로 바보의 마음이다! 멍청하고 멍청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빛나는데 나는 홀로 어둡고 세상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는 홀로 둔하다. 고요하기가 잔잔한 바다와 같고 끝없이 흐르되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쓰임새가 있는데 나는 홀로 완고하여 쓰일 곳이 없다. 나 홀로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어머니한테 얻어먹고 자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노자의 어머니. 예수의 아빠


노자 전체 81장중에서 가장 긴 본문 내용을 지닌 장이다. 노자는 전체가 5000자로써 춘추전국시대를 전후로 나온 경전 중에는 가장 짧다. 참고로 논어는 1만5천자, 맹자는 3만5천자이며, 가장 장문의 경전은 한비자로서 10만자에 이른다. 거기에 비해서 노자는 산문이 아닌 운문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깊게 자신의 철학을 들려주고 있다. 


암튼 오늘의 본문에서는 다짜고짜 “절학絶學-배우는 것을 그만두라”고 한다. 진짜 배움은 사람이나 책이 아닌 ‘자연에서 배우라’라는 말이다. 마치 사람들에게 “하늘에 나는 새를 눈여겨보라. 들에 핀 나리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라”(마태6.25-34)는 예수의 말씀과 데자뷰이기도 하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서 이래저래 어렵지만 “어머니한테 얻어먹고 자라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라고 20장 본문을 마무리 짓는다. 노자가 어머니라 부르는 대상은 예수에게는 하느님 ‘아빠’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희년선포와 한국평신도



▲ 제50회 평신도 주일 포스터. (사진출처=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2017년 11월 18일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보도자료 내용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회장 권길중, 약칭: 한국평단협) 설립 50주년을 맞아 ‘평신도 희년’을 지내도록 승인하였으며, 교황청 내사원은 한국의 평신도들을 위해 전대사를 수여하는 교령을 보내왔다. 한국평단협은 1968년 7월 23일 창립되었으며, 주교회의는 평신도들의 자각과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적응하는 사도직 활동을 위해 매년 연중 마지막 전 주일(내년부터는 연중 제32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정하고 전국 모든 성당에서 이를 지낸다.’


평신도희년 선포는 기쁘고 좋은 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대로 외국 선교사 없이 한국인 자발적으로 이뤄졌으며 그 한국인이란 바로 평신도였음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더욱이 대외적으로 폐쇄적이고 대내적으로 정치적 요인이 겹치며 초기 평신도의 태반이 순교의 역사를 이어왔고 그런 역사를 배경으로 현재의 한국천주교회가 서 있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기리고 있다.


평신도 희년에 돌아봐야할

평신도의 자리


▲ 2018년 2월 25일자 가톨릭평화신문 2면 ⓒ 가톨릭평화신문


평신도희년이라고 하느님의 은총을 교리화한 전대사도 좋고, 한국평단협이 기획한 희년독후감공모, 자료집 발간도 좋고, 실천사항으로 ‘전월세 안올리기 운동’이나 ‘아시아 교회돕기 사업’등도 실효성이 있든 없든,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그 기획의도는 평단협 창립 50주년을 맞는 희년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비롯된 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새삼 묻는 것이다.


교계제도는 교구를 중심으로 이끌어 나가고, 그 교구라는 제도교회의 구성은 분명 성직자와 평신도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주신 각자의 카리스마에 알맞게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루카17,10)이다. 새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역사하심임을 알고 있다면 ‘하느님의 일’은 어느 일방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미우나 고우나 모두 함께 한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 하는 일이다. ‘새는 좌우날개로 난다’는 말이 자연의 진리이듯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낌이 있는 곳에 교회의 존립이 빛난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내버린 돌’?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적 신앙생활에서는 회장을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역할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교우촌 회장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천주교회가 이어 갈 수 있게 발 벗고 나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회장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회장의 인도 아래 교우촌의 신자들은 다시 힘을 얻고 다른 교우촌과 연락을 주고 받거나 교회의 일들을 서로 돕곤 하였다. 특히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회장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한국천주교회사2>. 2010. 한국교회사연구소. 149쪽)


성직자가 없던 시절 한국천주교회를 지켜온 것은 평신도 회장들의 힘이 크다. 또한 현재 성직자가 있는 상황 하에서도 평신도 지도자들은 분명히 교회의 한 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교구 홈페이지에서 평신도 지도자에 관한 정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거나 아예 언급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군종교구를 비롯한 16개 교구 모두를 열어보라. ‘위대하신’ 역대 교구장은 있어도 그들과 함께 교구를 이끌어온 평신도 회장들은 없다. 기껏 <기관단체> 이거나 <기타단체> 구석 어딘가에 평협이 링크 되어 있을 뿐,


▲ 교회의 구성원은 누구일까 (사진출처=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최초의 성직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보다 앞서 한국천주교회의 문을 열었던 최초의 평신도 회장 복자 최인길 마티아(1765∼1795)는 잊혀졌다. 평신도로 팔레스티나에 살던 젊은 예수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오래전 했던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12,10-11)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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