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17년 4월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영성의 빈곤 내지 부재는 대전환기에 처해 있는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일상생활 안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주교들과 사제들, 수도자, 평신도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적이라고 보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의 외양 안에 은닉된 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또 지도층들의 비공식적이거나 사적인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현실 사회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속물적 삶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단한 명성을 듣고 찾아가 보니 정작 속물인 경우가 많고, 들리는 소문은 흉측했는데 알고 보니 참 괜찮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공동체의 흐름이 매우 위선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주류에서 박수를 받고 있는 이들이 더 위선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근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문제는 ‘영성의 빈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복음적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오히려 정반대되는 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일반 신자들이나 예비자들은 삭막하고 혼탁하며 살벌하기까지 한 사회생활에서 지치고 시달린 나머지 교회 안에서는 대조적으로 온화하고 청정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안에서 위로와 의지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염증을 느낄 정도로 늘 부딪치기 때문에 회피하고자 했던 속물적 인간상과 생활양식을 교회 안에서마저 대하고 실망하고 되돌아서는 경우가 있다.
영성생활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중심으로 모시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는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영성생활이다. 영성생활은 사람들을 피해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삶, 현실을 벗어나는 삶을 상상할 가능성이 높은데,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이 거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평화를 바라지만 안정된 자기 마음을 흔들어 주는 것, 내 영성 수준의 적나라함을 드러내 주는 나와 친한 사람들, 나를 따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나가는 신앙의 길이다. 그들은 어쩌면 나의 영적 수준을 말해주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들에 얼마나 포용력을 가지는가에 따라 자신의 영적수준이 가늠된다.
세례 받은 지 오래되었다 해도 늘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떼 지어 다니고,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적대적 혹은 불편한 감정을 갖는 사람이 생기면 이것은 또한 그의 영적 수준을 볼 수 있는 가늠자다. 간혹 본당 공동체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자기 세력을 늘리기 위해 새 영세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본당 사목자와 적대선을 가지기도 한다. 전례나 행사 때는 늘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대접받기를 원하고 여러 가지 병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레지오나 꾸르실료 등을 수료했다 하여 영적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추악한 것을 다 담고 있는 골병 든 환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수준에 머무르는 자들이 많은 공동체는 이들이 만드는 분열상황 때문에, 알 수 없는 갈등과 소음이 그치질 않는다. 스스로를 내세우거나 가르치려들지 않으면서 기도생활을 할수록 더 많은 자기모순과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누구를 탓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희생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영성생활을 올바로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구성원들에게서는 그 지위를 막론하고 신앙으로 믿는 구원의 복음적 진리가 대체적으로 ‘머리’로 인식하는 것에 머물러 있을 뿐, 온몸 안으로 깊게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멘토로서 종교인들을 찾을 때, 처음에는 이들의 설교나 강의가 나름대로 진실하며 설득력이 있다는 매력에 끌려 접촉하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이론가 이상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말은 너무나 많지만 가치 있는 실천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가라지’들이 중심부에서 공동체를 좌지우지하며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너무 외적인 것, 성장, 발전, 화려함을 추구하고 있으니 많은 신자들은 보여 지는 것에 집착하고, 교회에서의 직책이나 책임, 자리나 위치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직책과 책임이 나의 영적 빈곤함을 채워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 그리하여 나와 공동체 모두를 복음적 삶으로 이끄는 일, 이것이 영적 성숙의 첫 번째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필립2,21) 교묘한 방법입니다. 이는 개인의 성향이나 여기에 물든 집단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띱니다. 영적 세속성이 외양 추구로 이어질 때, 늘 공공연한 죄를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9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