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합한 동기도 없고, 그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영성이 없이, 잘못 진행되는 활동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은 필요이상으로 힘들어지고, 때로는 질병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곤함과는 거리가 멀고, 긴장, 부담, 불만, 그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됩니다.
이렇게 나태한 사목을 불러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비현실적인 계획에 몰두하고, 자기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갖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몇 가지 계획에만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성공을 꿈꾸어서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직접 만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일을 비인격화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제 82항).
사제들의 ‘우울(depression)’을 조금 더 과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 이 시대의 사제들이 의기소침해지고 스스로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드는가? 또한 ‘절에는 덕망 있는 고승이 있는데 사제들은 나이가 들수록 까칠해진다?’ 는 표현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제와 수도자들의 인격적 성숙이 때로는 일반 혼인생활을 하는 사람만큼도 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지켜보게 된다. 변덕이 심하고, 때로는 과도하게 분노하고, 민감하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종종 스트레스가 과도하다 말하고, 때로는 많이 지쳐 있는 듯하다. 활력이 없다. 그리고 상당히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노르-아드레날린(Nor adrenalin)’과 ‘코르티솔(cortisol)’ 분비를 촉진한다. 이것은 피로물질이고 ‘화’를 자극하는 호르몬이다. 인간이 동물들의 위협을 받거나 신체보존의 위협을 느낄 때 반응하는 호르몬이 그들의 공격성을 가중한다. 곧 사제들의 공격성은 그들의 과도한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수의 사제들이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있다. 그들의 고독한 삶을 지탱해줄 영성적 원천을 발견하지 못하고 알코올이든, 음식이든, 도박이든, 운동이든 무언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부정적인 ‘과정의 중독(Process addiction)’이나 ‘물질적 중독(substance addiction)’인 경우에는 사목에 대한 혼란뿐만 아니라 중독의 부정적 효과가 주변 사람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복음에 중독된 사제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까지는 열심했던 사람들이 사제가 되고, 보좌신부 기간을 마치고 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은 10년 이란 시간, 나름 사제직을 준비하며 기도하고 노동하고, 연학을 하면서 지덕체의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으며 양성되었는데, 무엇이 이들을 우울과 무기력, 중독, 무관심과 피로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인가?
“교회의 일상생활에서 ‘잿빛 실용주의’가 그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든 일이 정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그 힘을 잃고 소심해집니다.” 일종의 무덤의 심리가 발전하고 교회를 천천히 박물관의 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들은 현실, 교회, 그리고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희망을 잃은 채 무기력한 우울함에 빠져드는 유혹을 체험합니다. 이 무기력한 우울은 “죄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복음의 기쁨, 제 83항).
이것은 비단 사제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사제만을 탓하고 개인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교회의 책임회피이다. 여기에 한국교회 구조와 운영, 영성의 총체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나쁜 신자가 나쁜 교회를 만들기도 하고, 나쁜 신자가 나쁜 신부를 만들기도 한다는 우스갯소리는 그저 빈 말은 아닐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라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곧 사제들의 문제들에 대한 책임은 사제와 평신도, 주교와 장상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주교들의 리더십은 작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교들이 교회의 확장과 팽창에만 분주하고, 사제들을 돌보고 살피는 일은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돈이 되는 사제는 극진히 모시고, 교구를 위해 침묵해 주고 방어벽이 되어주는 사제들에게는 온갖 혜택과 편리를 제공하지만 조금이라도 교구에 모난 소리를 하거나 입바른 소리를 하면 인사상의 온갖 불이익과 불편함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사제들은 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소위 ‘변방의 북소리’로 한 생을 마쳐 가는 적지 않은 원로 사제들을 보게 된다.
사제들은 ‘요구되는 삶’과 ‘실재적인 삶’사이의 분열을 괴로워한다. 어느 은퇴사제에게 “은퇴하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강론 안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그 은퇴사제는 사목하는 동안에 ‘강론을 참 잘 한다’라는 평가를 받던 사제였다.
그래서 “아니 신부님! 현역에 계실 때 많은 신자 분들이 강론을 참 좋아하셨는데요!”라고 말씀 드리자, “말만 잘하면 뭐하나!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 걸, 그러니 괴로운 일이었지”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사제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이러한 일상의 스트레스는 그들에게 신경증적인 증상을 만든다. 그렇기에 불안과 스트레스는 일시적인 해소책과 출구를 찾게 한다.
사제들의 삶도 일반인들의 삶과 같이 외로움, 좌절감, 질투, 분노, 시기, 기쁨, 슬픔 등의 수많은 감정들(Emotion)로 얼룩진다. 대중 앞에서 말을 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때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거나, 제어되지 못한 분노가 터져 올라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시기 혹은 질투), 혹은 발견된 자신의 결점에 대한 부끄러움, 수치심, 죄의식 등 이러한 무수한 감정들이 신체로 전이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것이 장기간 표출되지 못하고 눌려있게 되면, 삶에 대한 심한 무기력을 체험하게 되고, 자신 혹은 타인에게 위험한 행동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는 기억력과 판단에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사회 부적응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즐거움과 쾌락을 만들고,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감정들의 파고에서 안전해 지고자 돌파구를 마련한다. 그것은 알코올일 수도 있고, 다양한 약물일 수 있고, 일(Work)일 수도 있고, 이성 일수도 있고, 컴퓨터 게임, 도박일 수도 있다.
소통하고자 주변을 돌아보아도 누군가 자신의 문제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서지 않는다. 주교, 신학교의 양성사제, 연차 교육 담당사제 누구도 연약해진 사제의 문제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판단과 단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중대한 존재론적, 영성적 위기에 직면한다. 이러한 위기에서 문제를 잘 극복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제 보다는 환속하거나, 사제 생활에 대한 염증을 느끼며 먹고 사는 방편으로써의 삶으로 자신을 숨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목은 불가능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이는 사제 양성과정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사제 자신에게 닥쳐올 문제들에 대한 실재적인 수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신학교 양성자의 통제와 억압 가운데서 ‘톨레(추방)’ 공포증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단련하다 보니, 피교육자들(신학생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감추고, 부끄러워하면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보다는 감추는 능력만을 개발하고 심화시키는데 그 문제의 뿌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사제양성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개편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사제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학교에 사제들의 영성문제에 관한 전문가들이 없다. 그들의 심리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 신체적인 문제를 통합적으로 관리해주고,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인력보다는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판단하고 제거하는 기능으로써의 관리자들만 무수히 상주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연구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사목적 환경의 변화와 해외 교회의 동향, 보편교회의 움직임과 정책 등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그들은 책을 쓰지도 않고, 등재지에 논문 한 편을 올리지 못하고 대학교수진에 남아 있다.
수많은 능력 있는 평신도들이 다양한 신학과 철학, 영성과 심리학, 사목학 등을 전공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에게 강단은 철옹성이다. 한 치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파행들이 오랜 기간 지속되다 보니 실력 있는 교수진들은 교회에 대한 불편한 마음으로 성직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과 무시, 편견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편집국의 오피니언 글을 읽는 열심한 독자가 한 마디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가톨릭프레스는 문제만 만들지 않습니까?”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큰 발전이다. 지금 우리 교회는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지 못하고,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내리지 못하는 능력 없는 의사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진단하는 것도 큰 발전이고, 처방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장을 만드는 것도 변화를 위한, 치유를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독자님들이 이해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쪼록 한국교회가 새로운 비전을 준비해 나가는 새 천 년의 교회가 되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톨릭프레스의 창간목적임을 다시 한 번 거듭 천명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