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則全 곡칙전 枉則直 왕즉직 窪則盈 와즉영 敝則新 폐즉신 少則得 소즉득 多則惑 다즉혹 是以聖人 시이성인 抱一爲天下式 포일위천하식 不自見故明 부자현고명 不自是故彰 부자시고창 不自伐故有功 부자벌고유공 不自矜故長 부자긍고장 夫惟不爭 부유부쟁 故天下 고천하 莫能與之爭 막능여지쟁 古之所謂曲則全者 고지소위곡즉전자 豈虛言哉 기허언재 誠全而歸之 성전이귀지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2003. 삼인)
굽으면 온전하고, 굽히면 펴지고, 패이면 차고, 해지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고, 많으면 헷갈린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한결같이 지녀 천하의 법도가 된다. 스스로 자기를 드러 내지 않으므로 널리 드러나고, 스스로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므로 인정을 받고, 스스로 뽐내지 않으므로 공을 남기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우두머리가 된다. 대저 다투지를 아니하니 그러므로 천하에 아무도 더불어 싸울 자가 없다. 굽으면 온전하다는 옛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히 하여 道로 돌아가라.
혼배사제였던 신부님
언젠가 성소주일을 맞아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다. “신도들은 사목자요, 사제인 나를 목자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목자가 아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적이 없다. 나는 양 무리 가운데 한 마리 양일뿐이다. 목자는 예수님밖에 없다. 사목자는 글자 그대로 양 치는 일(牧)을 위탁받은(司) 사람(者)을 일컫는 말이다. 양을 돌보고 이끌고 살리는 일은 참 목자 예수님의 일이다. 사목자는 목자가 될 수 없고 스스로 목자의 자리를 차지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도둑이나 강도가 되면 안 된다.” (가톨릭마산 2041호) 신부님을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며 30여 년을 사는 동안 그 분은 예수님에게서 위임받은 일에 행복해 했고 행복에 겨워했다. 그는 그런 분이었다.
로마에서 갓 돌아온 신부님이 필자가 있던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 나는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었다. 신부님도 젊은 시절이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좌충우돌, 질풍노도 같은 시절이었다. 본당 청년회에서 만난 커플들은 결혼하기 전 청년들 앞에서 이른바 댕기풀이를 하던 전통(?)이 있었는데 내가 발바닥을 두들겨 맞던 날도 신부님은 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었다. 신부님은 나의 혼배사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은 나에게 평협(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임원을 하라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청년이 감히(?) 평협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파격이었지만 결국 신부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의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는가? 평협회의 때마다 어른들과 충돌하고는 했다. 한번은 주일학교 간식 예산과 관련하여 본당 회장과 의견이 엇갈려 의자를 박차고 나왔다. 그 날 평협회의는 나로 인해 아수라장이 됐다. 물론 신부님이 계신 자리였다. 그 다음 날인가 사제관으로 사죄를 하러 찾아갔다. 신부님은 한마디만 했다. “괜찮아. 할 말 한 거야. 그런데 조금만 침착하면 좋겠어.” 그는 그런 분이었다.
교향곡을 연주하는 정성으로
준비하는 강론
신부님은 늘 침착했다. 결코 서두르는 모습을 신자들에게 보인 적이 없다. 차를 타고 제일먼저 하는 일이 시동을 걸기 전 안전벨트였으며 두 번째는 손에 흰 장갑을 끼는 일이었다. 한동안 그런 모습이 나에게는 어떤 강론이나 말씀보다도 살아있는 공부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강론을 아이들 눈높이에서 하려고 이솝우화 전집을 곁에 두신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런 강론을 듣고자 일부러 어린이 미사를 참석하는 어른들이 생길 정도로 신부님의 말씀은 늘 쉽고도 감동적이었다.
신부님은 그의 강론집에서 고백했다. “저는 본당에서 사목을 하는 동안 원고 없이 강론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강론 원고를 꼭 준비했던 이유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서서 횡설수설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사제에게 주어진 큰 십자가이며 동시에 보람입니다. 사제는 말씀을 선포해야 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실히 강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늘 교우들 앞에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번지르르한 말에 비해서 저의 삶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입니다.”(『형제자매 여러분』(가톨릭출판사.1995))
신부님은 늘 강론의 첫마디를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살가운 말을 던지면서 시작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그 날 선포된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전했다. 때로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또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마치 교향곡을 연주하듯 늘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강론은 듣는 사람이 금방 느낄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분이었다.
“부처가 되리라”는
신부님의 다짐
신부님은 언젠가 부터 그의 아호를 한밝음 혹은 일명(一明)으로 사용했다. 아마도 신부님의 삶을 비추는 가장 적당한 이름일 것이다. 낙동강변의 봉쇄 수녀원 지도신부로 계시던 시절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자 신부님은 손수 쑥국을 끓이고 삼겹살 고기까지 준비해서 점심상을 차려주셨다. 물론 식복사없이 혼자 사셨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시절에 신부님은 송광사에서 하는 단기 출가에 참가했다. 신부님은 그곳에서의 시간을 10여 년이 지난 후 송광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송광사』(2007년 9월호)에 <4박5일의 행복>이라 적었다. “수련기간 내내 아침마다 예불대참회문을 외우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불렀다. 108배를 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절을 하며 내가 명호를 부르는 바로 그 부처가 되리라 다짐했다. 참나(眞我)는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들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오라. 몽둥이든 회초리든 꼬챙이든 오라. 참나를 찾는 방편으로 삼으리라.” 그는 그런 분이었다.
혼배 때 찍은 사진이 이젠 제법 오래되었지만 신부님의 강론 한마디는 아직도 나를 늘 일깨우고 있다. 강론 말미에 신부님은 나와 아내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른 후 “그대들은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 이후 30여 년을 지나는 동안 아내와 나는 결혼기념일 케잌에 불을 밝힐 때 마다 그 말씀을 새기고 있다. 어찌하다보니 나도 벌써 세 번이나 후배들의 결혼 주례를 했는데 나의 주례사 말미에 늘 신부님이 했던 말을 빠지지 않고 전했다. 마치 말씀(요한 1,1)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것처럼.
“나는 양의 탈을 쓴
이리였다”는 고백
신부님은 “나의 사제생활을 되돌아본다. 나는 자주 예수님을 가로막고 내가 목자인양 행세했을 뿐 아니라, 양들이 목자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적이 많았다. 양의 탈을 쓴 게걸 든 이리(마태 7,15)였던 적도 있었다. 부끄럽고 미안하다.”(가톨릭마산 2041호)라고 고백했다. 신부님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웅웅거린다. 신부님은 이제 원로사목자로서 지리산 기슭에서 산처럼, 물처럼 지낸다. 노자 22장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그 분은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