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17년 4월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성경(聖經)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거룩한 경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과 인간의 기원,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주관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회고하며 그들 손수 체험한 신앙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전했다. 성경은 오랜 역사 속에 펼쳐진 다양한 체험이나 사건들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메시지를 담아 전해 내려온 회고 록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구체적인 인류 역사 속에 살아온 인간들을 통해서 기록되었고, 그 당시의 언어로 씌웠으며,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의 제약을 받았다. 하느님은 성경에 당신의 메시지를 담아 인류에게 주시되 천상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실존의 한복판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해 주셨다. 이렇게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나 교부들은 성경이 기록되고 편집되는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일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최근 성경을 새롭게 읽기 바라고, 깨닫기 바라며 쓰기를 원하는 신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시작하기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시작한 다음에도 중도에 쉽게 포기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물론 각 권들의 중요한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성경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들어서야 높아진 것이다.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인 성경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가지 정해진 기간 별 성경프로그램이 독자적인 수도회나 교구별로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 교리 신학원에서의 성경교육도 개론 이해 수준에 그치고 만다.
하느님 친히 필요한 일꾼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고 영감(Inspiration)을 받은 성경의 기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적는데 자신들의 신명을 다 바쳤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 계시의 원천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살아 계신 말씀을 통해 치유되고,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의욕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을 내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다. 곧 ‘하느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시기도 하고 듣기도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성경 한 가운데서다. 우리는 성경을 접함으로써 살아있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 쇄신은 바로 여기에서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중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을 따라 오늘과 같은 목록 73권 (구약 46권, 신약 27권)으로 재확인함과 동시에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했던 자유로운 성경 해석을 배격하고 자국어 성경 번역을 단죄했다. 더불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권한을 오로지 사도좌에만 두는 결정을 함으로써, 성경 연구를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국어 성경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평신도들에게 성경은 늘 자신들의 곁에 두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대하기 힘든, 읽고 해석하는데 전문지식이 필요한 어려운 서적쯤으로 간주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성경 구절을 해석할 수 있으려면, 인내하고 온갖 분심을 버리고 그 본문에 경건한 관심과 시간을 기꺼이 바쳐야합니다. 다른 모든 긴급한 관심사를 멀리하고 차분하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 146항)
성경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148항)
풍요와 안락에 빠져있는 오늘날의 교회가 가장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해? 유혹? 세속화? 냉담? 아니다. 복된 말씀, 성경이다.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이 지금 교회에는 걸림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복음의 기쁨』이 이렇게 교회를 흔드는데 예수의 복음, 성경은 그들에게 아니, 또 나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가?
예수는 말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리고 어떠한 복수도 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끝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보다 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신하는 사람들이다. 굶주림, 빈곤, 질병 등과 싸우고, 버려진 이들을 돌보아 주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끊임없는 평화를 강조하는데, 정작 예수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칼을 주러왔다”, 혹은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한다. 참된 평화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은 모든 인간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국제 관계의 영역에 던지고 싶은 질문이며,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이 이 복음의 말씀이 스며들 때 평화에 도전 하는 우리시대의 위협이 사라질 것이고 참된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에페2, 14) 그리고 그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라고 증언한다. (에페 6,15)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며 그들을 불살라 버릴 까요”하고 말하자 예수는 그들을 엄중하게 꾸짖었다. (루카 9, 55) 겟세마 니에서 한 제자가 주님을 잡으러 온 자 중 한 사람의 귀를, 칼을 빼어 베었을 때 그 귀를 낫게 하셨고, 무력으로 제자들이 당신을 수호하기를 원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요한 18,11)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의 모범은 악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며, 순수한 수동적 태도도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더욱 강력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누군가 나의 오른 뺨을 친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손등으로 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다시 왼쪽 뺨을 들이대는 것은 ‘나를 인간으로 대접하고 관계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악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똑 같은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참된 사랑과 비움, 포기로 가능하다는 것을 그분께서 몸소 우리에게 증언해 주신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 인가?
현재 한국은 GDP 2만불 시대를 살고 있는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체인구의 7%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행복이 돈과 무관하다’고 말한 사람이 7.2%라고 하니 나머지 92.8%는 행복이 돈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경제력으로 세계 10대 강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이 정도다.
또, 오늘날 ‘핵과 테러에 대해 불안하고 두렵다’고 말한 한국인이 63%에 이르니 이는 심각한 수준의 국민 불안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평화는 무엇인가?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국가, 언론,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끊임없이 사회불안을 강조하고 조장한다.
불안할수록 힘과 권력은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에 용이하다. 이 불안과 두려움을 개인의 잘못으로, 시대의 문제로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고용을 불안하게 하는 대기업과, 사회적 안전과 보장을 두렵게 하는 국가 행정과, 이전투구의 양상을 보이는 정치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한 우리 모두에게 복음은 ‘지금이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서 본문을 침착하게 읽는 동안에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이 성경 본문이 ‘저한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 본문으로 바꾸고 싶으신 저의 삶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 본문 때문에 불편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 본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제가 이 본문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를 움직이는 이 말씀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저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저를 사로잡습니까?” (『복음의 기쁨』 153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