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퉁이 글 <바람소리>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부족한 글을 2016년 1월부터 가톨릭프레스에 연재했습니다. <붓과 시편>으로 2년간 연재했고, 2018년에는 <노자와 교회>로 만났습니다. 하반기를 맞아 7월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바람소리>라는 꼭지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그 바람 안에 성령이 담기기를 기도합니다. 김유철 두손모음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수많은 세대의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의 말은 별의별 뜻으로 왜곡되어 아무 뜻도 없게까지 되었다. 예수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들에게 겁을 주며 필부필부에게 어리석은 영웅심을 불어넣는 데 이용, 아니 악용되어 왔다. 예수는 자기가 뜻한 것보다 뜻하지 아니한 것으로 더 자주 찬양· 숭배 받아 왔다. 무엇보다 큰 역설은 예수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던 바에 속하는 바로 그 점들이 종종 되살아나서는 온 세상에 널리 설교·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수의 이름으로!”(『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앨버트 놀런. 분도출판사. 1980년. 1쪽)
그렇다면 예수가 뜻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예수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던 바는 또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전자의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손끝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며, 후자의 것은 우리의 마음과 손끝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들일게 분명하다.
사랑·평화·연대는 유효한가?
‘사랑’이 아직 우리에게 온전히 남아 있는가? 그것이 지닌 온기가 나와 이웃들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가? 과연 사랑의 불씨는 언제까지 우리에게 버텨줄 것인가? ‘평화’란 단어가 팔레스티나에는 여전히 유효한 개념인가? 그것이 전하려는 평온함과 따사로움이 한순간 전쟁의 불쏘시개로 돌변하지 않을 것인가? 사회교리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실천사항인 ‘연대’는 교리서에 박혀있는 말인가? 아님 교회쇄신 운동가의 이상적 구호에서 맴돌고 있는가? 그도 아니라면 도대체 ‘연대’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하는 것인가?
비단 ‘사랑’이니, ‘평화’니, ‘연대’에 국한한 자문은 아닐 것이다. 왜, 무엇이 우리의 마음과 손끝에서 예수가 뜻하던 바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인가? 혹 이미 사라져간 것을 물가에 엉거주춤 주저앉아 넋두리하고 있는 것인가? 답은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다.
쌍용차 30번째 희생자는
사회적 타살이다.
얼마전 쌍용자동차와 관련하여 30번째 자살자가 나온 소식을 듣다가 나는, 그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교회는 이 사건에 책임이 없을까 생각했다. ‘원인에 따르는 결과’라는 의미가 담긴 불교의 인과법因果法에는 직접적인 원인과 함께 가장 소극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원인마저도 능작인能作因이라 부르며 그것을-사건을-존재케 하는 원인이라 여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서로 의존하며 너나없이 하나로 사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쌍용차 사태는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5일까지 70여일일간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이 일방적 구조조정에 반발해 평택 공장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이다. 2009년 8월 5일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공권력의 무력진압이후 당시 쌍용차 지부의 지부장인 한상균을 비롯한 64명의 노조원들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고된 노동자와 가족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듯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어두운 시간이 계속되었고 지난 6월 27일 30번째의 희생자가 나온 것이다.
빌라도는 살아있는 것인가?
그가 죽음의 길을 나서기 며칠 전 했던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파업 종료 직후엔 친구들도 꽤 만났다. 그때마다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싸울 수 없으니 내가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점점 얼굴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전엔 몰랐던 실제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았다. 갈수록 이 세상이 점점 빠듯해질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내 아이들이 불쌍하다.” (한겨레 2018.6.30. 12면)
쌍용자동차 30번째 희생자는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어김없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해야 마땅하다. 설마 빌라도의 목소리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유효한 것인가?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마태 2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