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퉁이 글 <바람소리>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부족한 글을 2016년 1월부터 가톨릭프레스에 연재했습니다. <붓과 시편>으로 2년간 연재했고, 2018년에는 <노자와 교회>로 만났습니다. 하반기를 맞아 7월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바람소리>라는 꼭지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그 바람 안에 성령이 담기기를 기도합니다. 김유철 두손모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인문학 이론서의 제목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한때 인기 있는 개그의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말이 ‘불편한 진실’이다. 아마 이런 저런 불편한 진실 중의 압권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말이다. 한마디로 그 말은 거짓말이다.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결코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와서는 안 되는 미래를 담보로 한 거짓말이다.
지금과 같은 소비패턴, 환경파괴,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구조,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빅 메이저에 의한 투명계단으로 이루어진 계급구조는 ‘지속가능’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현혹해서 이끌고 나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마태15,14) 이라는 예수의 말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번 돌이켜보라. 대형매장에 들어서면 즐비한 식음료와 공산품들, 돈만 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더 동시대의 사람들과 후손들 앞에 펼쳐질 것으로 여기는가? 미안하지만 아니 슬프지만 그것은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미망이며 착각이며 한갓 꿈일 뿐인 불편한 진실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말은 1987년 세계 환경개발 위원회(WCED)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우리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보고서에서 “미래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개발”이라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말의 정의를 내렸다.(daum백과 참조) 그러나 불행하게도 ‘개발’이라는 용어는 토건공학적 의미에 걸신들린 자본주의와 결합된 마구잡이 난개발로 곧장 이어졌고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마치 운전사 없는 자동차 형상으로.
심지어는 그러한 ‘발전’과 ‘개발’의 의미가 종교계에도 스며들어 수많은 사업체와 병원, 학교, 각종 기관으로 번져나가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는 얼토당토않게 ‘복음화’니 ‘불국토’니 허무맹랑한 이름도 슬며시 곁들여서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연구자들이 지향한 의미는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의 개념이 지속 가능한 개발의 핵심이며, 이는 환경 보전과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 발전을 조화시켜 현 세대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것이 미래 세대에게 전달되기를 지향한다는 야심찬(?) 꿈이었지만 그것은 꿈으로서 끝나야 한다.
전진이 아니라 후퇴하라.
마르코복음서의 시작은 서둘러 예수의 첫 음성을 이렇게 전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가 말한 ‘회개’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선포이며 요청이었다. 아마도 그 분은 광야에서 접한 하느님의 음성을 그렇게 표현했던 모양이다. 종교적 언어인 ‘회개’를 종교와 담을 쌓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회적 용어로 들려준다면 그것은 ‘지속가능한 후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진정 요청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당면과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눈과 귀를 비롯한 오감을 현혹시키는 요술에서 빠져나와 ‘지속가능한 후퇴’를 이행하는 것이다. ‘작전상 후퇴’로서는 하느님나라를 결코 만날 수 없다. 지금 즉시 ‘후퇴’하자. 그 길만이 회개의 길이며 모두가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