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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뽀빠이, 살려줘요!’ 대신 ‘올리비아, 살려줘요!’
  • 전순란
  • 등록 2018-07-18 10: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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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7일 화요일, 맑음


아직 어둑어둑한데 열린 창문으로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소란하다. 창밖을 보니 구장님이 논두렁에 풀을 잘라내고 있다. 동네 남정들도 나이 80이 넘나들며 손이 떨려 더는 기계를 못 쓰겠다고 ‘타는약’(제초제)을 치는데 그래도 구장은 70대 초반이라서 작년에 허리 수술을 하고서도 예초기를 돌리니 땅을 대신하여, 흙속에 꼼지락거리는 생명들 대신 고마움을 느낀다. 그는 이 동네서 논농사 짓는 마지막 농부다.




오늘은 좀 늑장을 피우기로 맘먹었는데 주변이 가만 두지 않는다. 토마스의 트럭도 탱크 소리를 내며 일터로 떠나고, 몸을 움직이는 일은 가능하면 8시 이전에 끝내는 게 좋을 듯해서 방방이, 거실, 서재, 계단, 복도, 식당, 부엌, 현관까지 깨끗이 청소를 하고, 걸레를 말끔히 빨아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려니 보스코가 “아구, 더러워 걸레로 얼굴을 닦다니!” 흉을 본다. 


“여보, 인하외할머니 말씀 생각 안나요? ‘세상에 물 씻어먹는 먹는 나라는 없다.’ 지금 내 얼굴이 이 걸레보다 더 더럽답니다.” 땀으로 더럽혀진 걸레를 다시 빨아 뜨거운 햇볕에 널어 말린다. 여름이 되니 물이 더 귀하고 고맙게 느껴지고 이렇게 맑은 지하수는커녕 흙탕물마저도 귀한 아프리카 사람들 생각에 물을 아끼게 된다.



‘초복’이라고 사방에서 사진을 곁들인 문자를 보내온다. 누구는 전복 넣은 삼계탕을, 누구는 화채 그림을 보내며 맛있게 드시란다. 문자 그대로 ‘그림의 떡’. 그런데 그림 대신 진짜 닭백숙을 대접하겠다며 먹으러 가자는 초복 전화가 왔다. 아랫집 도메니카의 초대. 도정 체칠리아씨도 초대받았는데 스.선생은 산티아고 순례 걷기연습을 하느라고 아침 일찍 산행을 나가 오후에나 돌아온단다. 네 사람이 칠선계곡 초입 ‘칠선산장’에 가서 예약해 놓은 닭백숙을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한더위에 초복이어서 식당은 손님으로 크게 붐볐다.


평소에 아내에게서 게으르다고 핀잔 받던 스.선생은 요즘 매일 20여 km를 걷다보니 당뇨도 정상 수치가 되었고 혈압과 콜레스테롤도 아주 정상으로 돌아왔단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면 모두가 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은혜를 입는다는데, 스.선생은 가기도 전에 미리서 은혜를 듬뿍 입었다.



우리가 듣기로는 아내가 텃밭에 내려가서 파 몇 뿌리만 뽑아오라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못가겠다던 남자여서 첫 달은 하루에 10여 km를 걷고 오면 힘들어 응신을 못하더니 지금 4개월이 지나서는 하루 25km를 걷고 와서도 집안일을 돌볼 정도로 신심이 건강해졌단다. 그 얘길 듣고 내가 눈에 힘을 주어 보스코를 쳐다보니 손사래를 치며 자기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로 충분해서 산티아고로 순례갈 일은 절대 없을 거란다.


이웃동네 사는 유선생이 ‘방안에 들어온 생쥐와의 사투’를 얼마나 재미있게 페북에 썼는지 나 혼자 낄낄 웃으며 ‘사내들이 용감한 척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여자보다 훨씬 나약함’을 실감한다. 90년대 초반 우리 우이동집 옆에 ‘우리신학연구소’가 있었고 남편 성염이 소장할 때의 일화. 



하루는 그 집에 들러보니 점심시간에 멀쩡한 가스레인지를 놓아두고 블루스타에다 라면을 삶고 프라이도 하고 있었다. 이유인 즉 가스레인지에 계란 프라이를 하려고 팬을 올리니 구더기가 렌지후드에서 뚝뚝 떨어지고 국을 끓이려 뚜껑을 여니 거기로도 구더기가 떨어지더란다. 총각들만 사는 집이라 ‘엄마’인 내가 등장하여 연장을 주고 렌지후드를 뜯어내게 했다. 아래쪽받침을 뜯는 순간 구더기가 한 사발은 쏟아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연통 밖에서 족제비가 연통을 타고 들어와 U자로 된 관을 되돌아나갈 수 없어 죽어 있었다.


주원씨더러 ‘족제비 시체는 꺼내다 버리고, 구더기는 쓸어다 버리고, 후드는 뗀 김에 깨끗이 닦아서 다시 달라’ 지시하고서 돌아서니까 총각들이 매달린다. “사모님, 가시면 안 돼요. 무서워요. 가시면 구더기와의 전쟁에서 질것 같아요. 도저히 못 만지겠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선구적인 가톨릭 평신도신학자들이 족제비 시체와 구더기가 겁나다니! 고무장갑을 끼고 아마존 전사로 나선 전순란이 모든 걸 해치운 다음에야 그 집은 평정을 되찾고 부엌은 정상화되었다. 구더기도 무서워하는 남정네들이니 유선생네 생쥐는 그보다 너무 큰 동물이다. ‘뽀빠이, 살려줘요!’라는 가녀린 비명 대신 ‘올리비아, 살려줘요!’가 굵직하게 들리는 세상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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