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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연중 제16주일 독서·복음 해설
  • 김수복
  • 등록 2018-07-20 17: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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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예레 23,1-6) 해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정의롭게 인도할 목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예레미야는 사악한 왕들과 지도자들을 호되게 책망한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그런 나머지 정치적으로도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기 희망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약속에 둔다. 주께서 당신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믿는다. 사악한 왕들을 자리에서 내쫓고 하느님이 몸소 당신 백성의 목자가 되어주시리라고 믿는다.


때가 오면 주께서 다윗의 자손을 일으켜 세워 당신 백성의 왕으로 앉히실 것이며, 그 왕은 당신께 온전히 충실하여 모든 사람을 ‘정의’로 다스리리라고 예고한다. 그 왕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하느님의 정의’로써 구원하리라고 예고한다. 그 왕의 이름은 ‘우리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라 불리리라고 예고한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다윗의 자손이신 그리스도께서 와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정의와 평화를 안겨 주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으로 당신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인류 안에 하느님의 ‘나눔의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 것이다.

 

시편(22) 해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이 시편은 착한 목자를 노래한다. 시편작가는 착한 목자가 행하시는 은혜로운 활동을 강조한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푸른 풀밭과 물터로 인도하고,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갈 적에도 당신의 믿음직한 지팡이로 지켜 주신다.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살기로 작정한 당신 양떼를 온갖 악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 양떼인 인류 가족을 당신처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푸른 풀밭과 물터로 인도하실 것이다.


제2독서(에페 2,13-18) 해설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 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갈라놓는 분열과 미움을 분쇄하신다>


바오로 시대에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차별과 분열과 대립이 엄존한다. 현행 법률을 철두철미 문자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법망을 교묘히 회피하기보다 법의 취지와 정신을 살리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현행 법률도 항상 양심과 자연법과 하느님의 법에 비추어 끊임없이 정화되고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나 성당에 나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을 믿고 인간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려고 노력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독선과 아집으로 굳어진 분열과 제도와 법률을 용인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당신만이 진리요 길이요 참 생명이시다. 당신 마음씨를 가지고 당신처럼 검소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신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몸으로 전달하고 목숨을 내걸고 선포하는 사람들만이 참된 당신 제자들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을 이룬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인류 화해와 일치의 원리이다.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사명이 막중한 이유가 인류의 하나 됨에 있다. 


복음(마르 6,30-34) 해설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고 목자 잃은 양들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오늘 읽은 마르코 복음 6,30-33은 제자들이 받은 사명과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연결시켜 준다. 그것은 마르코의 편집 작업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30절에서는 열두 사도들이 받은 사명을 지적하고 있다(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오직 이 대목에서만 12제자를 사도들이라 부른다. 사도란 개념은 원래 칭호가 아니고 기능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리고 31절(흔히 피정과 연관된 구절로 사용한다.)은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 앞에 나온다. 32절은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로서 예수님께서 자주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서 가르치셨음을 암시한다. 34절부터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코는,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으니 비할 수 없이 더 위대하시다고 말한다. 모세가 시나이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그 백성을 기적적으로 배불리 먹이셨다고 말한다. 유다인들이 종말에 큰 잔치가 벌어질 것을 기대한 그대로 바로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큰 잔치를 벌이신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온 세계에서 인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민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허기와 갈증에 지쳐서 자기들을 배불리 먹여 줄 참된 목자를 찾고 있다. 


구원자 구세주는 분명히 오셨고 와 계신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 숨어 계실까? 똑같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권을 뜨겁게 자각하지 못하고 되찾으려 뛰어들지 못하는 자기 자신들 속에 숨어 계신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민중이 스스로 그런 자각을 얻어 그리스도의 분신들이 되어 자기 자신을 구출해 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고 계심을 느끼고 인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


묵상


인류 평화에 대한 염원


안정과 평화에 대한 염원은 모든 인간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다. 어떤 인간이나 어떤 사회도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도 평화를 달성하고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한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평화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본질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진정한 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회피하거나 포기한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이 진정한 평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며, 그 평화를 이룩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서로 침공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기로 약속하는 계약이나 조약만을 뜻한다거나, 전시가 아닌 평화로운 시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타인들・자연・하느님과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평화는 축복이며 안식이며 영광이며 정의며 화목이며 구원이다. 물질적 선익임과 동시에 영적 선익이다. 성경에서는 평화는 항상 하느님께 원천을 둔 선익으로서 나타난다. 평화를 창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평화를 간청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에 대하여 “나쁘게 하여 주지 않고 잘 하여 주려고 뜻을 세우셨다.”(예레 29,11) 우리 인간들에게 결국 ‘끝없는 평화’(이사 9,6)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그 같은 계획은 수난과 죽임을 당하시는 당신 종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었다. 수난하시는 종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참된 평화를 얻는 데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실 것이었다(이사 5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안에 평화가 이룩된다.


인간들의 염원과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채워진다. 왜냐하면 미움과 분열과 싸움과 전쟁의 원천인 죄악이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분쇄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평화와 구원 사이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고, 그리스도만이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시키실 수 있고, 인류를 새로운 ‘한 몸’으로 창조하실 수 있고(에페 2,14-22), 하늘과 땅의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실 수 있다고 설명한다(콜로 1,20).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평화로 모든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는 끈은 성령이시고(에페 4,3), 성령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갈라 5,22).


그리스도께서 와 계신지 어언 2천년도 넘은 오늘날 인류는 사상 유례없이 자연과 더불어 자멸과 전멸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급박한 위기에 놓이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초부유한 나라 위정자들이 고수하고 있는 팽창주의・군국주의・경제적 침략주의 정책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부유한 나라들이 취하고 있는 자국 중심의 발전주의 정책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그런 나라 국민들이 그런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데서 비롯하고 있다.


이 같은 인류의 참상을 없애고 진정한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회개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인간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올바른 관계는 하느님이 모든 인간과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인간은 똑같은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이다.


그 관계를 구체적인 사회현실 안에서 실현하는 길은 가난한 나라 민중이 스스로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존심에 눈뜨고 자기네 권익을 지키기로 떨치고 나서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교회)의 사명과 구실이 나온다. 그 공동체는 먼저 소유와 소비생활 수준을 복음 전달 대상자들과 똑같이 한 다음, 그들 속에서 그들의 처지와 입장에 서서 목숨을 내걸고 정의와 평화 구현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말을 그 민중과 신앙공동체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원적인 발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민중의 편에 서고 민중과 동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기왕 그러지 못했던 신자들이 회개하여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애초에 그리스도께서(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는 신자들이) 이미 민중에 속한 민중이시기 때문에 민중 자체가 그리스도의 성년에 하루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 자신을 포함한 욕심 사나운 사람들과 나라들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쳐 넣으려 하지만, 민중 속에 민중으로서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몸 바침은 그런 사람들과 나라들까지 회개하게 하여 인류공동체 전체의 해방과 구원을 기필코 이루고야 말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에까지 도달하는 인류가족의 공동선인 평화를 기어이 쟁취하고야 말 것이다.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예레 23,1-6)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우리라>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시편(22)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제2독서(에페 2,13-18)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형제 여러분,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복음(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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