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2열왕 4,42-44) 해설
<엘리사가 행한 기적>
2열왕 2,1-13,21에는 엘리사 예언자가 행한 일련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적 이야기들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엘리사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을 때, 엘리야가 그에게 기름을 붓기 전에(1열왕 19,16),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그에게 걸쳐 주자(1열왕 19,19), 엘리사가 당장 밭을 갈던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엘리야를 따라나섰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겉옷을 걸쳐 주는 행동은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엘리야의 겉옷을 걸쳐 입은 엘리사는 엘리야의 정신을 이어받고 엘리야가 행하던 기적을 자기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물려받게 된다.
이 같은 특수한 문학유형은 주님 사상을 순수하게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한 두 예언자의 역사적인 임무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문학유형이다. 그들이 참으로 주님께로부터 예언자로 선택되었고 예언자로서 특은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빵을 많게 한 기적 이야기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상징적인 이야기다. 즉 하느님의 성령께서 발휘하시는 능력만이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런 하느님의 능력은 당신께서 파견한 사람의 활동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엘리사가 빵을 많게 한 기적의 핵심에 “그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이 표현은 이사 11,6-9에 언급된 결정적인 구원의 시기에 대한 환상적 묘사에 비길 수 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빵(음식)이 풍족하게 넘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시작해 놓으신 메시아 시대의 특징과 증표로 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주께서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탈출하게 하신 당신 백성을 만나로 먹이신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구세사 이야기는 연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주께서 끊임없이 인류 구원활동을 펴서 당신 백성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항상 중개자들을 통해서였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시편(144) 해설
<당신의 손을 벌리시어 모든 생물을 호의로 배불리시나이다>
이 시편은 찬미하는 기도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자기들 가운데 하느님이 신비스럽게 현존해 계심을 깨닫고 감사드린다(10-11절). 사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손을 펴서 배고픔을 채워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5-16절). 그러니 우리는 ‘먹고 마실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마태 6,25).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실현되도록 힘쓰면 그 나머지는 넉넉히 주실 것이다(마태 6,33). 자기 것을 너무 챙기지 말고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두 함께 넉넉하게 먹고 살게 해 주실 것이다.
제2독서(에페 4,1-6) 해설
<몸도 하나, 주님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뿐이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에서부터 ‘윤리’편이 시작된다고 흔히 말한다. 이 말을 1장부터 3장까지는 ‘이론’편이고 그 다음부터는 ‘실천적 적용’편이라고 규정짓는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곤란하다. 바오로에게는 그런 식의 명확한 구분은 없고, 다만 똑같은 구체적인 현실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는 수는 있었다.
구원의 신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다(1,3-14).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원의 신비를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하신다. 이 세상의 세력과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1,15-23),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당신 자유와 능력을 나누어 주고(2,1-10),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온갖 장벽을 무너뜨림으로써(2,11-12) 구원의 신비를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하신다.
구원의 신비는 온 인류가 하느님과 일치하고 친교를 누리는 신비이다. 이것이 에페소서 전체의 주제이다. 4장에서는 똑같은 신비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공동체이며(2,21-22). 자기가 전한 복음의 기쁜 소식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라고(3,1-21)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친교의 신비’가 그리스도의 표양과 힘으로 끊임없이 실현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 공동체가 받은 소명이다(4,1).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과 평화의 덕행을 실천하여(2절),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결합시키시도록 할 일이다(필리 2,6-11; 콜로 3,12-13).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뭉치게 할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이시며,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당신 안에 일치시키는 아버지시다(6절).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일진대 오직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성령의 힘으로 인류의 합심과 단결과 평화를 위해 몸 바쳐야 한다. 이 세상의 야심가들과 대항하여 투쟁하려면 “발에는 평화와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라.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아야 한다.”(6,15-16)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어야 한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참조. 에페 6,17)
복음(요한 6,1-15) 해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들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요한의 복음서 가운데서 1절과 15절이 삽입된 점이 두드러진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피하여 혼자 계시고 싶어 하고, 당신을 메시아-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의 열정을 피하려 하신다. 2절에서도 메시아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계속된 기적들을 보고서 예수를 따라온다.
4절에서 파스카 축제가 임박했다는 설명은 ‘이집트 탈출 기적’ 및 ‘사막에서 내려진 만나의 기적’과 결부되어 중요성을 띨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을 건널 적에는 각자 필요한 만큼만 만나를 가져갈 수 있었지만(탈출 16,4.16-18),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고도 남게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이야기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채워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야기 끝에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는데, 열둘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여 얻는 음식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온 인류)이 먹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이 기적을 본 군중은 예수님께서야말로 기다리던 예언자이고(참조. 신명 18,15; 요한 1,21), 세상 안에 오셔야 할 분이시라고 단정한다(마태 11,3; 루카 7,19; 요한 1,9.15). 그러나 군중의 생각은 단순하고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신다.
묵상
성찬례=미사성제=성체성사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우리 믿음을 확신하게 해 주는 증표일 뿐 아니라, 당신이 오늘 이 시점에도 인간들 마음속과 인간들 가운데서 엄연히 살아계시고 살아가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이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신 새로운 사랑을 반복하여 보여 주시는 증표이기도하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사랑은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구절로써 단적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새로운 사랑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원수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은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허기진 군중・고통 받고 우는 사람들・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품고 계신 큰 사랑과 애착을 입증해 주는 기적이다. 복음서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온 관심과 애정과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로운 인간 사랑은 또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항상 기도하는 것처럼, 앙갚음이나 보복이 아니라, 내가 잘못하거나 못된 길에 들어서 있을 때 남이 나를 두고 절망하거나 포기하기를 바라지 않는 바와 같이, 나도 다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어 주는 태도를 지킬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고,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손해와 해악을 끼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려 할지라도 끝까지 그런 사람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마음속에 미움을 품을 수 없고 그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열망해야 함을 지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수에 대한 사랑과 용서야말로 나약한 인간들이 서로 부축하고 모자란 것을 채워 주면서 합심하고 뭉칠 수 있는 유일한 끈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에게 큰 애정과 애착을 보이시는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분이시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현재 인류 가운데 그런 사람 숫자가 절대다수다.) 존재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까지나 그들 편이고, 가난뱅이와 천덕꾸러기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 부와 향락과 명성과 권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러기를 탐하고 있는 사람을 나머지 한 사람까지 모조리 매질하여 회개하게 하려 하시는(용서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분) 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천대받는 사람들・실업자・비정규직 노동자・농민・민중을 편드시는 방식은 증오와 폭력을 무기로 삼는 투쟁을 통하여 혁명을 이룩하게 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방식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과 모든 사람(인류 전체)의 마음을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고 구원하시는 방식이다.
먼저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기들도 하느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요 똑같은 형제자매라는 자각과 자존심을 일깨워 주고(해방과 구원의 출발점),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과 인간 자신들과 인간의 능력도 그 주인과 소유자는 오로지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깨닫게 하고, 그 모든 것과 인간들의 능력과 살과 피와 목숨까지도 서로에게 바치는 기쁨을 누리라는 ‘하느님의 정의’를 일깨워 주고,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 자신부터 자기네 마음속에서 어서 빨리 남보다 “더 소유하고 더 소비하고 더 누리고 남 앞에 자기를 내세우고 남위에 올라서고 남을 부리고 남을 지배하고픈 욕심”을 말끔히 청산하고 단절하도록 일깨우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순서다. 가난한 사람들과 천대받는 사람들이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하나로 뭉치는 날, 그 앞길을 가로막을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중 제17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2열왕 4,42-44)
<먹고도 남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시편(144)
당신의 손을 벌리시어 모든 생물을 호의로 배불리시나이다
제2독서(에페 4,1-6)
<몸도 하나, 주님도 한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뿐이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요한 6,1-15)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