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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어머니’라는 환상
  • 김혜경
  • 등록 2018-08-03 16:07:07
  • 수정 2018-08-07 11: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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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주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이틀 밤을 보내시고는 생을 마감하셨다. 치매 같은 것도 없이 여든 일곱 해, 그 정도면 아쉬운 듯 적당했고 병원에서 오래 고생도 하지 않으셨다며 다들 호상이라 입을 모았다. 


아버님은 지병도 있으셨고 몸도 약하셨던 터라 시어머님은 늘 아버님 건강을 염려했다. 인정 많고 베푸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입이 짧으신 아버님의 식사 때문에 언제나 노심초사하셨고 맛난 걸 준비하느라 매일 새로 장을 보곤 하셨다. 이런저런 가족의 대소사 등 아버님을 대신해 몸으로 움직여야하는 건 모두 어머님 몫인 듯했다. 붙임성도 좋은데다 달변이신 어머님은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생활력도 아주 강한 분이다. 그에 비해 아버님은 말수도 적으시고 좀 차갑게 느껴질 만큼 꼬장꼬장한 분이셨다. 이웃에 사는 분이 반갑게 인사를 해도 고개만 까딱하실 뿐 눈도 잘 마주치질 않으셨다. 며느리인 내가 본 아버님은 경제활동 외에는 모든 걸 어머님께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보였다. 


그런데 아버님 장례를 치르고 서류며 은행 일을 정리하다 여러 개의 예금통장 중에 어머님 이름으로 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적인 건 뭐든 다 아버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어, 이게 뭐지? 머리가 띵한 느낌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안팎의 살림살이를 죄다 어머님이 나서서 하신 걸로 아는데, 그렇게 여든두 해를, 결혼 생활만 육십년이나 하신 분께 개인 통장 하나 없다니. 너무 의아했다. 그동안 아버님이 어머님을 의존했던 것보다 어머님이 아버님을 훨씬 더 많이 의존하며 사셨던가보다.


아니,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버님은 ‘남자’였다. 어머님은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아니 아버님의 그늘아래를 외려 자랑스레 여기며 살아오신 거였다. 두 분의 삶을 한 꺼풀 들추니 견고한 가부장제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학자인 정희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식민지배와 압축적인 성장 때문에 독특한 젠더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로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묵묵히 아버지와 자녀들을 뒷받침하는 어머니를 ‘지혜롭다’며 존경하는 문화다. 당신 개인의 삶은 뒤로한 채 그저 헌신하고 희생하라는 어머니. 정작 가족의 구심점은 아버지이면서, 가정을 위해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기꺼이 전담하라는 어머니.


이를 위해 가부장사회에서는 ‘모성’이 여성의 본능인 것처럼 포장하고 가르쳐 왔다면서 저자는,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정치학’이라 일갈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는 여성에게 부과되고 강요된 성역할 제도의 산물이지 생물학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거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거나 ‘여성이 한 일이 아니라 어머니가 해낸 일이다’ 등은, 여성은 가부장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에 충실했을 때만 사회의 성원이 될 수 있다는 걸 반증하는 표현이란다.(p.61)


근대적인 인권의 개념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이다. 그런데 가부장사회는 인간의 범주에서 여성을 제외하거나 남성을 여성의 우위에 두려는 체제다. 여기서 근대적 인권과 가부장제 사이에 모순이 생기는데 이를 해결하려 모성을 ‘발명’했다. 실제로 ‘아동기’와 ‘모성’은 남성인 가장 노동자만을 ‘개인’으로 상정한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고안해낸 이데올로기다. 이에 따라 백지상태로 태어난 아이의 인생이 어머니의 노력여하에 달렸다는 ‘모성이데올로기’도 생겼고 이 때문에 어머니들은 커다란 부담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거나 대신 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머니에게는 마치 천부적으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호도해온 거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를 억압해온 역사는 자본주의 역사보다 스무 배는 더 오래되었단다(p.72).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걸 잊었고, 자신이 바라는 것과 가부장제가 덧씌워놓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니 이제라도 딸들은 어머니를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고 스스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사회는 남성에게도 어서 어머니의 성스러운(?) 역할을 부과하란다.

 

근대자본주의사회 이후부터 일터는 공적인 영역, 집은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가부장제는 공(公)을 사(私)보다 중요한 개념이 되도록 공고히 했고, 여성은 사회적 시민이나 노동자보다는 성역할 정체성을 우선시하도록 젠더화되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집은 경쟁이나 권력관계, 노동이 없는 평화로운 휴식처요 사적인 장소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집은 끊임없이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해야 하고 프라이버시도 잘 보장되지 않는 곳이다.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하면서도 권력은 다른 사람, 아버지에게 있는 아이러니의 공간이다. 


그래서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여성은 남성과 같아지기 위해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해야 했다. 그러나 남성은 여성만큼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려하지 않았다. 한 수 아래라 여겨온 가사노동과 자녀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왔던 비가시적인 재생산 노동에 어떤 남성이 굳이, 왜 뛰어들려 하겠는가? 그러다보니 남성처럼 되려는 여성은 임금노동에다 가사와 육아노동까지 이중 삼중의 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미니즘은 이렇게 기울어 있는 운동장을 지적하면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근대적 개인, 근대적 주체의 권리를 보장하라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남녀 성별에 관한 이슈만이 아니라 장애인이나 노인, 성소수자 등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식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평등, 그러니까 같아짐(same)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자는 거다. 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여자 어쩌고 하는 말에 욱하는 나는 ‘여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남성과 대화를 나눌 땐 생각이 짧은 ‘비장애인’이 된다. 상황에 따라 내가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다중적 주체’임을 인식하는 것(p.27) 역시 페미니즘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우리를 혼란과 고민에 빠뜨린다.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남성 중심적 사고와 사사건건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건 아니다. 남성과 공동체, 인류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는 인식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별이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듯, 빛과 어둠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 하는 건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이를 이분법적인 대립으로 이해하고 승패를 가르거나 위계를 나누려 한다. 


저물녘의 붉은 노을과 새벽 무렵의 여명이 아름다운 건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경계의 시간은 우리에게 기존의 방식으로는 만날 수 없는, 신세계로 나아가는 신선한 가능성과 상상력을 선사한다.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他者)를 받아들이면서, 골머리를 앓으며 경계를 걸으려는, 그것이 페미니즘이다. 


우선 시어머님 이름으로 된 통장부터 함께 만들고, 읽기를 좋아하는 어머님께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 ‘어머니’라는 만들어진 환상을 떨쳐내고 어머님만의, 멋진 은발의 페미니스트로 첫발을 내딛으시길 바라면서.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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